정해연 작가의 신작을 종종 만나곤 했는데, 어쩌다 보니 초기 출간 작품들에 손을 대고 있다. 누구나 처음이 있는 것처럼, 작가에게도 첫 작품이 있을 텐데, 이제까지 만난 정해연 작가의 작품들은 초기 출간작들과 최근 출간작들 사이에 큰 차이는 잘 모르겠다. 어떤 작품이든 만나다 보면 재미의 정도는 다를 수 있는데, 이 작품은 재미의 정도를 따지기 보다는 기존에 만나왔던 작품들과 다르게 조금 가볍게 접근할 수 있는 일상 미스터리 소설이 되지 않을까 싶다.
주인공은 정차웅은 봉명아파트 관리사무소의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시니컬한 태도로, 삼선슬리퍼 질질 끌면서 다니는데도 거슬리지 않는다. 그 자체가 패션처럼 보일 정도이니, 우중충한 아파트 분위기 안에서 유일하게 빛이 나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하다. 특히 싫어하는 것은 오지랖, 남의 일에 참견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가 어쩌다 보니 아파트의 온갖 사건사고에 그의 기지를 발휘하면서 은근슬쩍 참견하고 있던 거다. 알고 보니 그의 정체는 전직 형사, 그것도 섬세하게 들여다보는 탁월한 능력을 뽐내던 형사였다. 무슨 사연으로 형사를 그만두고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 일하게 됐는지 모르겠지만, 이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해결에 큰 역할을 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봉명아파트는 사람들이 수시로 들어오고 나가는 임대아파트다. 아파트에서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나는데, 하나같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은 ‘CCTV만 있었어도...’ 뭐 마음 같아서는 당장 한 대 달아도 되겠지만, 회사에서 설치해주지 않는 이상 누구도 개인 돈을 들여 이 아파트의 안전을 책임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런 아파트에서 계속 사건이 일어난다. 한밤중에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도둑이 들고, 방문교사로 일하며 이 아파트에 사는 여성이 실종되어 시신으로 발견되고, 아파트 입주자가 아닌 사람이 아파트에서 자살하기도 한다. 누가 엘리베이터 안에 오줌을 싸놓는 것도 화가 나는데, 급기에 오줌은 똥으로 변하면서 엘리베이터 오물 사건의 정점을 찍는다. 또 누군가는 집안에 있는 상태로 사망했는데 침입 흔적조차 없으니 사건 해결에 난감해진다.
그것뿐만 아니라, 그에게는 아파트 업무보다 더 거슬리고 피해가고 싶은 대상이 있다. 바로 아파트 부녀회장이다. 지나치게 잘 생긴 그의 얼굴을 위 아래로 훑으며 말을 거는 이 아줌마를 보면 불러도 못 들은 척 돌아간다. 그를 두고 수위를 넘나드는 성적인 말도 서슴없이 내뱉는 이들을 어떻게 하지도 못 하고 죽을 맛이다. 그 와중에 전 직장 동료인 형사 강주영과 마주치면서 하루하루가 스펙타클하다. 어쩌다가 이 아파트에는 이런 사건들이 계속 일어나고, 왜 매번 담당 형사는 강주영이며, 관리소장의 기분에 따라 몸을 사려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의 촉은 죽지 않아서, 형사 강주영이 담당하는 사건마다 은근슬쩍 실마리를 제공하고, 그의 추리에 신중을 더한다.
아마 강주영은 그가 왜 형사를 그만두었는지 모른 채로 궁금증이 쌓여가던 중에, 이 아파트의 사건들을 기회로 그의 비밀을 듣고 싶었을 거다. 나도 궁금했다. 그는 왜 형사를 그만두었을까. 나름 사연은 있겠지만, 마치 천직처럼 사건 해결을 잘 해 왔던 그가 갑자기 그만두었을 때는 이유가 있겠지 이해하면서도, 궁금한 건 어쩔 수 없다. 뭐, 이 사연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야 풀리긴 하는데, 단순히 한 사람의 비밀 같은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는 개운함보다, 마치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지 한 마디 들을 기분이랄까. 어떤 일 앞에서 마치 내 탓인 것처럼 자책하면서 살아갈 필요도 없고, 그런 일을 겪었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것도 아니니, 잘 추스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게 마치 우리 의무인 것처럼 말이다.
괜히 형사가 아닌 것 같다. 그가 하는 추리마다 그럴싸한 배경이 있었고, 읽으면서도 당연하게 흔적을 놓치고야 마는 게 나라는 독자라면, 조용하게 사건의 이면을 보면서 해결하는 게 정차웅이었다. 사람마다 가지고 사는 사연들이 어두웠지만, 이야기는 흥미롭고 유쾌하게 사건 해결에 다다른다. 특히 엘리베이터 오물 사건은 이 소설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었다. 누가 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아무도 못 본 사이를 틈에 오줌과 똥을 그렇게 싸고 다니는지. 이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지가 가장 궁금했는데, 의외의 이유로 똥 사건의 배경을 듣고 나니 진짜 웃음만 나더라는. 교묘한 트릭을 발견하는 재미도 있었고, 평범한 일상을 누리는 아파트라는 장소에서 볼 수 있는 사연들이었기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었다. 이러한 일상에 미스터리라는 요소가 더해지니,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내는 오늘이 참 평범하면서도 복잡하게 흘러가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더라. 누구나 자기만의 사연, 이유는 있는 거니까.
가볍고 유쾌하게 읽히면서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 읽는 동안, 몇 편 계속 이어지는 드라마를 상상하기도 했다. 주인공은 전직 형사 정차웅, 배경은 그가 정체를 숨기듯 새 인생을 시작한 봉명아파트,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아파트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에 빠짐없이 나타나는 정차웅, 표면에 드러나지는 않지만 사건 해결에 지대한 역할을 하는 숨은 브레인, 뭐 그런 설정을 머릿속에 그리며 읽는 재미를 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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