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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한낮의 햇살이 너무 따스해서, 지금이 겨울이라는 것을 잊었다. 아침에 나가면서 유독 찬바람이 매서웠던 오늘 아침에, ‘맞다, 지금은 겨울이었지’ 하고 내 몸에 다시 각인했다. 그 아침에 파지를 주우러 리어카를 끌고 나온 할아버지 한 분을 보고서, 엄마가 입버릇처럼 했던 말도 떠올랐다. 차라리 여름이 낫다고, 힘든 사람한테 겨울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힘들다고. 내가 가던 길을 계속 가면서도, 리어카를 끌고 파지가 쌓인 곳으로 돌고 돌을 그 할아버지를 계속 떠올렸다. 지금쯤 그 리어카에 파지가 가득 실려 있기를, 내가 바랄 수 있는 것은 고작 이 정도여서, 아팠다. 그렇다고 내가 너무 여유 있는 삶이어서 이런 생각을 한 건 아니다. 전혀 여유롭지 못한 날들이지만, 길거리의 호떡 한 개가 2천원이라는 말에 머릿속으로 기억하던 달짝지근한 호떡의 맛을 지웠지만, 그래도 아직 식당에서 한 끼 해결할 돈이 주머니에 있어서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가난 속에 있는 것 같다.


20여 년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온 저자 안온이 이 책의 제목을 ‘일인칭 가난’이라고 적은 이유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한국의 가난을 대표할 수 없다고, 가난의 양태가 가지각색이어서, 그래서 이 책은 일인칭일 수밖에 없다고. 그랬다. 우리는 각자의 생활수준을 자기만의 기준으로 계산한다. 그러니 여유롭다는 말도, 가난하다는 말도 지극히 개인적으로 일인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겠다. 저자는 또 말한다. 그러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라고. 그랬다. 그의 가난은 어느 한 부분에서 정리되고 판단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가난이 개인적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난의 기준은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이며, 국가가 이 가난을 돕기 위해 만들어놓은 제도는 어떤 기준으로 적용 대상을 정하는가. 이 문제는 행정복지센터의 사회복지 담당 부서에 몇 번만 가 봐도 직접 볼 수 있다. 누군가가 사는 게 어렵다면서 기초생활수급자 신청을 하였으나, 여러 기초 조사 결과 대상자로 선정되지 못했다는 통보에 찾아와서 담당자에게 소리 지르면서 싸우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이 제도는 현재 이 사람이 살아가는 상황을 그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각종 서류로 판단하는 게 대부분이라, 자식의 월 소득이 천만 원이 넘는다고 해도, 자식이 생활력 없는 부모의 삶을 책임지지 못하는 현실을 반영하여 판단하기가 어렵다는 거다. 온갖 서류 속의 ‘나’는 현실의 나와 같지 않음을 시사한다. 그렇다고 지금 사는 환경만으로 판단하는 것도 기준을 세울 수 없다. 말 그대로 소득 수준이 설명해주지 못 하는 많은 요소가 주관적일 수 있어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가 개인의 가난 척도가 되지 못하고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이상하게도 너무 잘 알아서 고통스러운 이야기들에 시선이 머물곤 했다. 아직도 이런다고? 사교육을 감당할 수 없는 형편은 EBS교재를 지원받으며 채우는 일, 방학식날 우유 한 박스를 어린 아이들 손에 들려 보내고, 지원 기관에서 어학연수 프로그램에 참여시켜주기도 하고, 이런 거 말고도 여러 기관에서 이들을 돕는다고 손을 내미는 행위들이, 고마우면서도 때로는 가슴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작년 겨울에 지역아동센터에서 사회복지 실습을 했다. 센터에 등록된 아이들은, 일반 가정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장애아동 가정이 대부분이었다. 방과 후 학원이나 다른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고 바로 센터로 오는 아이들이었다. 그러다 한 아이가 무거운 우유를 들고 오는 것을 보고 받아주었는데, 방학식 날이라 학교에서 주었다고 했다. 아직도 기초생활수급자 아동에게 방학식날 우유를 이렇게 준다고? 어느 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방학식 날, 담임이 친구를 불렀고 친구는 우유를 한 박스 들고 왔다. 집으로 가는 길에 그 친구에게 물었다. ‘근데 선생님은 왜 너한테만 우유를 이렇게 많이 주는 거야?’ 그때의 내가 이 사회적 제도를 몰랐던 게 핑계가 될 수 없었고, 그 아이에게 상처가 됐을 거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내 질문을 그대로 받은 그 아이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들키고 싶지 않은 뭔가를 들킨 게 속상하다는 듯이, 이 무거운 우유를 어디에 내다 버리고 싶다는 듯이. 사회적 도움을 받는 게 나쁜 건 아닌데, 그 우유를 들고 가는 모습은 마치 사회적 낙인이 찍힌 것처럼 되었으니까. 방학식날 아이들에게 우유를 들고 가게 하지 말고, 각 가정에 배송해주는 방법은 없을까? 무겁기도 하지만 이 우유를 들고 집으로 가는 그 길이 몇 배로 멀고 고단했을 거라는 것을, 그 마음을 헤아리는 관계자들이 한 명도 없는 걸까? 아니면, 아무리 방법을 찾아도 아이들에게 직접 들고 가게 하는 것 말고 다른 방식의 전달 방법을 찾지 못한 걸까.


가난은 일상을 불편하게 한다. 때로 삶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하는데, 그 삶을 유지하게 만드는 힘은 쉽게 생기지 않기도 한다. 가끔 이 상황이 슬프기도 하면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게 하는 걸 보면, 이게 힘을 내는 건가 싶기도 하다. 그래서 벗어날 수 있느냐고? 누군가 맨 바닥에서 시작해서 엄청난 부를 이룬 이야기를 들으면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생각은 매번 현실에서 부딪혀 무너지기 쉽다. 너무 고통스러워서 감당하기 어려웠다는 말에 함부로 판단해서 말을 건네지 말기를. 각자가 겪고 감당하는 그 고통을 크기가 다 다를 것이기에. 거기에 내 맘대로 고르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가족의 무게가 그 고통을 더하기도 하니, 도대체 이 가난의 구성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인가 궁금해지는 것도 이상하다. 저자 안온의 시각장애인 아빠는 알코올중독이었고, 교통사고로 무릎이 아작 난 엄마의 경제 활동도 어려웠다는 게 가난을 대표하는 원인이 되지는 않는다. 그저 이 가난의 한 부분이었을 테니까. 의도하지 않았지만 부딪혀버린 교통사고, 그 일로 엄마의 경력은 단절되었고, 저자 역시 학업과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지쳐버린 몸을 돌볼 겨를도 없었다. 최저시급의 일자리를 전전하게 되는 시간들, 여성이어서 당하는 몸과 마음의 폭력들, 알코올중독 아버지가 휘두르는 가정 폭력까지 버무려진, 그렇게 한꺼번에 모인 이유들로 가난의 생명력이 질기고 길어졌다고 해야 하나.


언제까지 겪어야 할까. 이런 날들이 반복되고, 또 겪고. 누군가는 또 저자의 시간과 같은 흐름으로 오늘을 견디고 있을 거고. 저자가 들려준 여러 상황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의 가난이 현재형이라는 것을. 저자가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내가 직접 보았으니 길게 더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알겠으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은 근심에 마음이 무겁기만 하다. 저자 안온은 대안을 제시하거나 자신이 겪은 가난의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이 사회 문제의 관심을 촉구하는 이야기에 아무 감정이 들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솔직한 마음이다. 오늘의 날씨는 너무 추웠고, 내일도 추울 거다. 이번 겨울의 혹한을 예고하던 말들이 귀에 강하게 남아 있는데, 이 가난의 추위는 언제 어떻게 지나가게 되는 걸까.


나의 가난이 과거형이 된다 해도 우리의 가난은 진행형이기에, 이 책은 일인칭으로 쓰였으나 일인분짜리는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썼다. (일인칭 가난, 10페이지)


이 책 일인칭 가난』의 끝부분에 담긴 복지 신청 방법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한국의 복지 시스템은 신청해야만 혜택을 볼 수 있는 구조이고, 가끔 복지 사각지대에 있는 주민을 제보해달라고 홍보하지만, 그런 방법으로 대상자를 얼마나 선정할까 싶기도 하다. 청년들이 학교에 다니면서 장학금도 확인해야 하고, 일상을 지내려면 아르바이트도 쉬지 않아야 하는 게 현실이다. 관계자들이 대한민국 선별 복지의 구조에서 찾아내야 할 것은 누군가의 절박한 목소리가 아닐 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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