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기준이 되는 것은 저마다 다르다. 돈을 쫓는 사람에게는 돈이, 행복과 안정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조금 부족해도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떠올리는 게 우선이 된다. 이상하게도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하나를 희생하게 되는 인생의 계산법은 늘 적용되는지라, 언제나 선택은 하나를 포기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기도 했다. 이섭이 북으로 올라갔다가 남으로 내려오면서 선택한 우선순위, ‘이쪽에서 내 가족을 희생시킬 만큼 더 나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뿐이었던 결정은, 그의 인생을 유령의 시간으로 만든다.
“솔직히 난 어떤 사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생각은 안 드네. 다만 어떤 게 더 인간적인 제도냐의 문제겠지. 나는 겁 많은 사람이라서 그냥 내 가족과 아이들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네. 내가 믿는 신념 때문에 가족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을 뿐이네. 제 몸만 아낀다고 비난해도 좋네. 나는 아이들이 칼끝에 손만 베여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네.” (134페이지)
일제강점기가 끝났다.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들도 있었다. 이게 행복일까 싶은 것도 잠깐, 사회주의를 꿈꿨던 이섭은 경찰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다. 경찰이 그를 대신해서 아내와 어린 딸을 잡아갔지만, 아무런 죄가 없는 이들이 곧 풀려날 거로 믿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그는 이념을 좇아 북한으로 간다. 모든 것이 공평하게 나눠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곳에서 자리를 잡으면 남은 가족을 불러와야지. 아마도 이런 마음으로 목숨 걸고 북으로 올라간 건 아닐까. 막상 보게 된 북한의 현실은 그가 바라던 이념과 너무 달랐기에 또 한 번 목숨을 걸고 임진강을 건너 남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마주한 또 다른 현실은 잔혹했다. 그의 아내와 아이들이 북으로 갔다는 소식에, 그는 죽은 사람처럼 살아간다.
거창한 바람도 아니었는데, 현실은 잔혹했다. 내 가족과 행복하게 살아가고 싶었던 소박한 바람은 한 사람을 살아있는 유령으로 만들었다.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숨을 쉬고 있으나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도 아쉬울 것 없을 것 같지만 그에게는 책임져야 할 또 다른 가족이 있다. 그가 두 번째로 꾸린 가족 역시 그의 행복이고 책임이었으니,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은 그를 번번이 좌절하게 했고, 북쪽을 바라보면서 키운 그리움 또한 계속 쌓여가기만 했다. 먼 거리에서 수면위로 비추는 조명이 이상하게 깜빡일 때마다, 이름 모를 고무배가 남쪽으로 흘러왔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희망 고문은 커졌다. 내 가족이 그렇게 흘러 남쪽으로 오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몰려왔다. 창자의 내벽에 굵은소금을 박박 문질러대는 것도 같고 칼로 자근자근 저미는 것도 같은 통증이었다. 10년 가까이 전쟁터에 갇혀 오직 홀로 싸움터를 누빈 영성이 아버지의 고독한 울음소리 같기도 하고, 그 시간 동안 자신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남자를 보며 시린 가슴을 견뎌야 했을 여자의 외로운 울음소리 같기도 하며, 20년이 다 되도록 전생의 감옥에 갇혀 그리운 이들을 찾아 헤매다 어느새 쉬어버린 이섭 자신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다. 심지어 신혼의 골방에서 신랑이 폭사했다는 미자의 울음으로도 들렸다. 어쩌면 그 모두의 것인지도 모를 울음이 이섭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198페이지)
창문 너머로 아파트가 보이는 북한의 한 호텔에서, 화자인 지형의 목소리로 시작된 이 소설은 첫 페이지에서부터 이념으로 분단된 한반도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런 현실에서 지형은 작가가 되어 북한에 방문하게 되었고,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의 간절함을 조금이라도 풀어드리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쉽지 않았다. 아버지가 평생 품고 살았던 비통함은 그래서 더 안타깝다. 살아있다고 믿고 있으니 만날 것 같았지만 그러지 못했고, 금방이라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지만 닿지 못했다. 기다림에 애가 타지만 그래도 견딜 수 있었는데, ‘사회안전법’은 또 한 번 한 사람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그저 가족과 행복하고 싶다는 바람으로 가졌던 이념이, 그 이념을 좇아가고 싶었던 선택이 이렇게까지 잔인할 수도 있나?
이념, 역사, 정치 등 많은 화두가 언급될 수 있는 소설이겠지만, 한 사람의 삶으로 읽혔다. 그 인생의 흐름 사이에 이념 갈등, 민족의 역사, 현실 속 정치적인 면이 부정할 수 없이 존재한다는 게 아이러니이지만. 혹시라도 그는 현실적인 문제에 갇혀 자기 삶이 다르게 읽힐까 봐서 걱정이라도 했을까. 자신의 삶을 유령의 시간이라고 선언하면서, 스스로 그 모든 이야기를 쓰고자 했다. 몇 장 쓰지도 못한 채로 생을 마감할 줄은 몰랐겠지만. 그렇게 첫 문장이 시작되고 40년 만에 작가가 아버지의 인생을 완성했다고 한다. 그래서 더 의미 있다. 내가 접근할 수 없던 시대의 불행을, 울음 가득한 외침을 듣게 한다. 역사가 쥐고 흔들었던 누군가의 고통스러운 인생에서 보아야 할 것을 고민하게 한다.
개정판으로 읽게 된 지금, 굉장히 잘 읽히는 소설이지만, 생각해 보면 많은 것이 의아하기도 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났는데도, 뭐가 달라졌는지 나는 잘 모르겠다. 사상을 나누어 이야기하는 것도, 오물 풍선을 날려 보내고, 확성기를 틀어대고, 남과 북의 대화는 단절되었으며, 급기야 남과 북을 잇는 다리를 폭파하기에 이른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 안타까움 속에 존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유령 같은 인생은 누구의 몫인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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