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사람은 익숙해진다.
즐거운 일에도, 괴로운 일에도, 상냥함에도, 미움에도.
남에게 상처 주는 일에도. (218페이지)
실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2016년에 출간된 『짐승의 성』의 개정판이다. 출간 당시에는 궁금하면서도 읽을 기회가 없었는데, 새 옷을 입고 이렇게 다시 눈앞에 보이니 궁금증을 가둬둘 필요가 없었다. 이미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세뇌’와 ‘살인’이, 이 소설 안에 가득하다. 추측만으로 이 소설의 내용을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건, 어떻게 세뇌와 살인이 더해져 이런 끔찍한 이야기를 만들어냈는지 다 알 수 없어서다. 게다가 실화라니, 아마 이 소설을 다 읽은 후, 많은 독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이야기가 우리 삶 곳곳에서 침투하려고 숨어 있는 게, 너무 무섭다고.
상처투성이 소녀 마야가 경찰에 보호 요청을 한다. 1년 넘도록 맨션 선코트마치다 403호에 감금된 채로 살았던 아이다. 경찰은 사건을 인지하고 해당 맨션으로 가서 아쓰코라는 여자를 체포한다. 경찰은 마야와 아쓰코의 진술을 바탕으로 이 사건을 재구성하는데, 두 사람 모두 진술하고 있지만 구멍이 많다. 이들의 진술이 사실인가? 어떻게 이런 관계, 살인이 가능하지? 무엇보다 이들이 말하기를, 자신을 조종하여 감금, 협박, 살인을 하게 만든 요주의 인물 요시오는 어디에 있는가. 수사가 계속되면서 하나씩 밝혀지는 비밀이 있었지만, 완벽하게 사건이 맞춰지지 않아서 더 난감했다. 그 와중에 이 살인자들의 손에 생명을 다한 이들의 원한을 누군가가 풀어주어야만 한다. 형사들은 역할을 나누어 이 사건에 몰입했다. 마야와 아쓰코의 진술을 끌어내려고 애쓰고, 이들이 살았던 선코트마치다 403호와 그 주변을 탐문하였으며, 작은 단서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면서 점점 수면 위로 떠오르는 이 사건의 진실에 모두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맨션 선코트마치다 403호. 그곳은 짐승의 소굴이었다. 요시오와 아쓰코는 마야의 아버지를 끌어들이고 감금 폭행하기 시작한다. 돈을 끌어 와라, 이 수건 한 장을 쓰는 게 얼마이다 등등 한 사람을 완전히 조종하기 시작했다. 마야를 볼모처럼 붙잡고 아버지를 학대했다. 요시오는 이들 서로서로 폭행하고 고문시키면서, 이 학대의 순간을 즐겼다. 그러다가 마야의 아버지가 죽고, 이 책임을 또 딸에게 떠넘긴다. 돈줄이 끊어졌으니 또 다른 돈줄을 찾아야 한다. 요시오는 아쓰코와 그녀의 가족에게 눈을 돌리고, 또 온갖 협박과 폭행을 일삼았다. 가족이라는 이름의 이들을 묶어놓고 서로를 감시하고 폭행하게 했다. 생각해 봐라, 내 앞에서 내가 직접 내 가족을 폭행하고 고문하면서 제정신으로 버틸 수 있을까?
사건은 선코트마치다 403호와 그 주변의 작은 연립에서 동거 중인 세이코와 신고의 이야기가 교차로 진행된다. 서로 사랑하며 함께 살고 있는 젊은 남녀, 어느 날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신고는 세이코의 아버지를 처음 보게 된다. 아무리 연인의 아버지라고 하지만, 계속 같이 살 수는 없다. 그것도 종일 집에 있거나 가끔 외출도 하는데, 활동하는 시간도 불규칙하고 도대체 밖에서 무엇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신고는 우연히 세이코의 아버지를 미행하다가 뭔가 미심쩍은 일들을 보게 되고, 이미 어떤 사실을 알게 되기 이전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처음에는 마야와 아쓰코가 빨리 진실을 다 쏟아내기를 바랐는데, 뭔가 감추면서 하나씩 꺼낼 때마다 답답했다. 그렇게 하나씩 드러나는 진실에 기함하듯 놀라기를 여러 번이다. 이게 사실이라고? 어떻게? 이 두 사람이 그 모든 것을 보고 지금 살아있다는 게 놀라기만 할 뿐이다. 계속 숨기고 있거나 아니면 조용히 도망쳐서 새 인생을 살아도 될 텐데, 굳이 경찰에게 도움을 요청하면서 꺼내고 싶은 이야기만 조금씩 꺼내는 이들의 진짜 목적이 무엇일지 의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하나둘, 정말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생각했다. 세상 그 어느 것보다 인간이 가장 무서운 존재였다는 것을.
2002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저자가 재구성했다고 한다. 3대에 걸친 일가족 일곱 명이 희생된 연쇄살인 사건. 딸이 부모를 죽이고,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누나가 동생도 죽이는, 그 시체를 해체하여 처리했다는 끔찍한 이야기가 믿어지는가? 그 가운데에 이 가족을 이간질하고 협박하고 조종과 살인까지 저지르게 한 인물이 마쓰나가 후토시라는 남자였단다. 이 소설에서 그렇게 찾아내고 싶었던 요시오이다. 한 소녀의 신고로 이 학대 사건이 드러났고, 너무도 잔인한 진실에 일본 정부가 대중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보도 제한 조치까지 내렸다고 한다. 저자가 이 사건을 접하고, 이 사건이 인간의 어두운 면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 준다고 생각하여 이 사건과 관련된 많은 자료를 모으고 써 내려간 작품이다.
어디선가 봤던 독자의 후기 한 줄이 생각난다. 토할 것 같다고. 나 역시 그랬다. 처음에는 문장을 잘못 읽은 줄 알고 한참을 들여다봤다. 아니었다. 시체를 처리하는 방식에서 이보다 더 잔혹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마치 오랫동안 해 왔던 일 처리하듯 시체 처리하는 장면을 보고 토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긴 게 다행일 정도였다. 차마 문장 그대로 옮겨오기 힘들었으니, 살면서 이보다 더 고통스럽게 읽은 소설이 있을까 싶다.
혹시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왜 당해? 나라면 바로 도망쳐 나올 텐데, 더 힘들어지기 전에 경찰에 신고할 텐데 하면서,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거로 믿을 수도 있다. 나도 그랬다. 요즘 세상에 이렇게 이유도 모른 채로 당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고? 아니었다. 읽을수록 더 진해지는 건, 만약 나라도 이 지옥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이상하게도 내가 사는 세상과 먼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수없이 많은 거짓말로 사기 치는 사람, 가까이에서 사람 마음에 들어오려고 애쓰면서 자기 이익 계산하는 사람, 자기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타인에게 떠넘기고, 그렇게 생겨나는 누군가의 고통쯤은 가뿐히 무시하는 사람. 찾아보면 너무 많다. 나는 당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없는 건, 어느 틈에 내 마음에 들어와 나를 휘젓고 있을지 알 수 없어서다.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말에 휘둘려 어떤 결정을 내리고 행동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인간이 그렇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외치고 싶지만, 인간이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모순을 끌어안고 사는 게 우리 현실이었다.
읽는 동안 요시오라는 악마를 계속 찾아다녔다. 그의 끝을 어떻게 보여줄지 궁금하면서, 그가 저지른 일에 합당한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자취를 매의 눈으로 살폈다. 그래서 요시오는 붙잡혔을까? 그동안의 잘못을 뉘우치기나 할까? 추리소설답게 저자는 또 다른 반전을 마지막에 숨겨두고, 독자에게 그동안의 사건을 복기하게 한다. 앞에서 들었던 진술을 다시 찾아보고, 어느 부분에서 틈이 있었는지 확인하여, 이 사건의 시작과 끝을 정리하게 한다. 처음부터 마야와 아쓰코의 진술을 토대로 진행되는 이야기에서 이들을 세뇌한 요시오를 파헤치면서 따라가다 보면, 요시오에게 세뇌당한 이들이 보이는 행동을 파헤치는 과정까지 함께 진행된다. 인간의 본성을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지만, 인간의 잔인함에 더 궁금한 게 많아졌다.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을 세뇌하여 조종하던 요시오보다 요시오에게 세뇌당했던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게 더 충격적이어서, 아직도 속이 울렁거린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생길 때마다 멘탈 관리 잘하라고 들었던 말이 계속 생각난다. 이래서 정신 똑바로 붙잡고 있어야 하는 건가 싶은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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