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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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렌지와 빵칼
  • 청예
  • 10,800원 (10%600)
  • 202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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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젠가 시작된 이 바람은, 다른 사람에게 거절을 못 해서 속 끓이던 게 쌓이고 쌓여 시작된 거다. 지금은 다를까? 그때보다 나아지긴 했으나 내 성에 차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바람에 남아있다. 나는 지금도 바란다. 거절 잘하는, 아니 거절해도 되는 상황에 미안함을 떠올리지 않고 거절을 말을 서슴없이 뱉고 싶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걸까. 아마도 자기 검열, 자기 통제, 타인을 배려한다는 도덕적인 나를 만들어가려고 그런 건 아닐까. 뭐, 이유가 한 가지는 아닐 테다. 중요한 건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런 자기 통제 속에서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미치거나 심각한 우울증에 빠지고 말 거라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한 번에 모든 걸 되돌릴 수도 없지 않은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거절도 잘 하고, 하고 싶은 말 다 하고, 뭔가에 이끌리듯 타인의 불행이나 악한 장면에 웃음이 나기도 하는 사람이 되는 거 말이다.


오영아. 27세의 유치원 교사. 유치원에 새로 온 아이의 폭력을 감당하기 어려웠다. 읽으면서 아이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의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도는, 화를 내는 지점도 납득이 안 되는 이 아이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아이의 하원까지 도와야 했다. 그녀는 아이를 엄마가 운영하는 빵집에 인계하고 나서도 하고 나서도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한다. 아이의 하원을 시켜주는 건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 이렇게 계속해 줄 수는 없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비싸기만 한 그 빵집의 빵까지 사서 나온다. 한없이 착하고 너그러운, 업무가 아닌데도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 개인적인 하원까지 해주는 교사로 그녀의 이미지를 만든다.


그녀의 친구는 또 어떤가. 지구를 살리는 많은 일에 동참해야 한다고, 지구 저편에서 굶어 죽는 아이들에게 후원금을 보내야 한다고, 나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자기가 하는 말과 행동의 옳음을 당연하게 인정해 줘야 등 정말 피곤한 존재이다. 그녀는 친구에게조차 부정적인 말을, 거절의 말을 하지 못한다. 속으로는 많은 생각을 하지만, 정작 친구에게 꺼내는 말은 모두 긍정의 대답이다. 네 말이 맞지, 네가 옳아, 그렇지, 등등. 하아. 이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진짜 궁금하다.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니 끝이 어떻게 되었느냐고. 말해 뭐해. 화병이 나서 쌓이고 쌓이다가 죽었겠지. 그런데도 우리는 오영아가 보여준 것과 크게 다르지 않게 살아가는 순간을 종종 발견한다. 그러면 안 되는 상황에 자주 놓이고, 자기 마음 표현 다 하고 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우선하다 보니 참게 된다. 이 정도쯤이야 하는 마음인 걸까. 어느 순간에나 있는 자기 검열의 순간을 적응한 걸까. 타인과 살아가는 세상에서 받아들여야 하는 당연함일까. 그녀의 애인도 그녀에게 요구하는 건 친구와 다를 바 없었다.


어느 날, 그녀는 자기 일상에서 웃음이 사라진 걸 알아차린다. 주변을 살피며 억지로 웃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사과하던 그녀는 그렇게 된 이유를 찾다가, 상담 센터를 찾는다. 그녀가 당연한 것처럼 여기던 일상의 습관을 바꿔줄 곳. 뇌 시술을 하는 곳으로, 그녀는 ‘정서 조절’ 시술을 받는다. 그동안 참아왔던 자기 통제의 선을 끊을 방법이었다. 이 방법이 적용되는 기간은 4주다. 그러니 뭔가 잘못되었어도 4주 후면 원래의 자기 모습으로 돌아온다고 하니, 일탈 같은 변화를 겪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다.


변했을까? 변했다. 그동안의 ‘오영아’는 떠오르지 않을 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억눌린 욕망이 그녀의 입으로 튀어나왔다. 유치원에서 아이들의 싸움을 방관했다. 친구가 하는 말에 자기 생각을 서슴없이 꺼내며 지적했다. 이런 행동은 평소 오영아가 보이기 싫었던, 주변 사람을 잃기 싫어서 선택한 방식과 완전히 달랐다. 파괴적인 장면들에 웃음이 났고, 속으로 욕했다. 자기 생각이 맞는다고 피력하고, 그동안 억눌렀던 모든 감정이 그녀의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때로는 폭력적이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에 뭔가 잘못된 것을 느끼고 상담 센터를 찾아가 이유를 물었으나, 시술의 효력이 끝나는 때만 기다리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대로 계속 살아가야 한다고?


한편으로는 시원했다. 그동안 살아왔던 방식이 그녀를 좋은 사람, 착한 사람으로 포장해 주었는지는 몰라도, 그녀의 안에서 꿈틀대던 반박의 감정들은 이제야 세상을 만난 것 같았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가 느끼는 것도 그녀와 비슷한 해방감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현실의 우리는 여전히, 지금도 자기 검열을 하면서 살아가고 말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실제로 내 주변의 몇몇은 기아에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후원한다. 한 달에 커피 서너 잔만 안 마셔도 가능한 일이라고, 나에게도 이 후원에 동참하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별로 내키지 않아서 따로 답변하지 않았는데, 이 후원을 하지 않으면 나는 나쁜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나는 계속 내가 마시던 커피를 마시고 싶고, 만약에 커피를 안 마신다면 그 돈으로 내가 필요한 것을 더 챙기고 싶은데? 결과로만 보면 나는 대답하지 않았고, 여전히 후원 활동도 하지 않고 있으며, 계속 마시던 커피도 마시고 있다. 그런데, 그때 이후로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무심코 커피 한 잔씩 마실 때마다, 내가 뭔가 잘못하고 있는 건가 싶은 마음도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의 정의가 상대방의 정의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뱉은 말에, 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눌러 담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오영아처럼 묵은 감정을 어느 순간에 폭발하듯 쏟아낼까 봐 걱정되기도 한다.


여러 관계를 맺고 유지하면서 때로는 나에게 필요한 상황에 도움을 받기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이 ‘관계’를 해치는 태도는 지양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또 다른 방에서 쌓이고 있는 것들을 돌보지 않는 것도 문제가 된다. 소설 속 오영아가 보여준 모습이 그랬다. 그녀가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고 고마운 관계들 속에서 지켜야 하는 선을 만들고 살아가던 그녀가, 어느 방 하나에 쌓아둔 감정이 쏟아져 문이 열렸을 때 보인 행동에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그래도 한 번은 그녀가 받은 전두엽 시술을 받고, 내가 억눌렀던 나로 살아가는 시간을 맛보고 싶기도 하다. 소화제 마시고 체한 게 다 내려가는 듯한 개운함이 있지 않을까. 어차피 4주 후에는 원래의 나로 돌아온다고 하니, 4주의 시간 동안 경험했던 것을 근거로 새롭게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설정이 좀 과장되어 보일 수도 있지만, 읽다 보니 푹 빠져든다. 뭐야 이거,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거였어? 매 순간 양보하고 절제하며 자기 통제를 하듯 살아가는 게 꼭 당연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였네. 적당히 선을 지키며 살아가도 되는데, 왜 자꾸 모범을 보이고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착각이 심어졌던 걸까. 이 세상에서 살아가며 버티려다 보니 저절로 쌓인 내공이었던 건가. 어쨌든 오영아가 시술 후에 보인 모습들에 속이 시원해진 건 사실이다. 그녀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더라도 조금 변한 태도로 살아가지 않을까 기대하게 되는 건, 그녀가 친구에게 쏟아내던 말들 중에 있다. “나는 너를 존중할 수 있다. 단 네가 나를 존중할 때만.”(124페이지) 그랬다. 이 말 한마디면 살아가는 동안 맺는 관계의 기준, 내가 보여야 할 태도,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는 선이 만들어질 것 같다. 나를 존중하는 이들에게만 양보와 배려를 보여주면 된다. 그걸 알아가는 데 어떤 방법이 필요하다면, 오영아가 받은 시술도 한번 생각해 볼 만하다.


소설의 끝부분에 다다르면, 반전도 있다. 읽다 보니 어느 순간 ‘어?’하는 느낌이 오는데, 오영아가 시술의 효과를 보여주는 최고점이 아닐까 싶다. 먹을 때는 고통스럽고 불편하지만 다 쏟아내고 보니 아무것도 남지 않은 후련함을 주는 게, 꼭 대장내시경 약 먹은 것 같다. 안 그래도 요즘 화장실 가는 게 불편해졌는데, 생각난 김에 대장 청소 한번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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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뚫어뻥도이것보다시원하게뚫리지는않을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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