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한 책
달못 2018/10/2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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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영혼
- 요안나 콘세이요 그림
- 17,820원 (10%↓
990) - 2018-10-24
: 7,290
모눈종이 위를 걸어다는 것 같은 기분으로 사는 한 남자가 있다. 어느 날부터인가 그는 영혼이 없이 살고 있다. 도리어 그것이 효율적인 삶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렸다. 남자는 의사를 찾아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했는데, 사람의 영혼은 몸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 해서 그의 영혼이 남자를 찾아오지 못 하고 길을 잃었기 때문이란다. 남자는 기억 속 자기만의 장소에 가서 영혼이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바로 이 장면에서 책에 트레이싱지로 된 페이지가 처음 나타난다. 뭘까?
같은 페이지, 트레이싱지에는 나무들만 울창하게 서 있는데, 뒷 그림에는 나무 뒤로 작은 집이 있다. 좌우가 연결된 그림은 여기까지이다. 이후로 왼쪽과 오른쪽 화면에는 서로 다른 장면이 이어진다. 영혼의 여정과 남자의 기다림이다. 남자는 한 장소에서 계속 머물러 있고, 왼쪽 화면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어떤 장면들을 계속 보여주는 것 같다.
흑백의 짙은 연필로 섬세하게 그려진 그림들이 이어졌다. 그러다 왼쪽 화면, 영혼의 여정에 노을처럼 황금빛이 가늘게 나타났다. 그리고 다음 장엔 각각 두 개의 길이 있다.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길을 이 끝과 저 끝, 집 안과 밖에서 마주 보고 있는 것이다.
두 번째 트레이싱지가 나타났다. 마침내 그의 집 창문 앞에 그의 영혼이 나타났다. 그리고 마주한 두 사람. 순간 너무 놀랐다.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과연 영혼은 어떤 모습일지 조심스레 상상해 봤는데 정말 뜻 밖이었다. 그의 영혼은 어린 아이 모습이다.
영혼의 속도가 느리다는 의미가 단순히 이동하는 공간을 이야기한다고만 생각했던 거다. 그의 영혼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느라 시간적으로 아직 어린아이였던 것이다.
남자가 자신을 잊어버린 것은 재앙이지만 한편으로는 행운이다. 그는 차분히 자기만의 장소에서, 자기만의 시간을 보내며 온전히 집중하였고, 자기 내면의 아이를 만난 것이다.
— “드디어!!” 영혼은 숨을 헐떡였습니다.
그때부터 화면에는 생기를 보여주듯 색연필 그림이 그려져있다. 그리고 그 둘은 더 이상 나뉘어지지 않고 한 화면에 같이 있다.
— 그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트레이싱지가 끼워진 두 지점 사이에 있는 각 페이지 윗쪽에 보면 알 수 없는 숫자들이 찍혀 있다. 책을 다 보고나서야 그 숫자들은 남자가 영혼을 기다린 날, 영혼이 남자를 찾는 여정을 가리키는 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 6개월 정도 된다.
그제야 생각났다. 이것은 상담 장면에서 자주 목격하는 일이다. 한 번도 생각하지 못 했던 과거의 기억들이 떠오르고, 어느 시기에 고착된 자기 내면 아이를 만나기까지의 여정 말이다.
내 안에 있는 어린아이를 억지로 자라게 하거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 책에서 ‘남자는’이 아니라 ‘그들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다고 하는 것처럼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길을 찾는 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무척 궁금했다. ‘올가 토카르축’, 역시나 그는 심리학을 전공했고, 맨부커상을 수상한 적 있는 폴란드의 대표적인 소설가였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이라는 묘사로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내가 생각한 것과 같은지 모르겠지만 책을 보는 동안 모눈종이 안에 갇힌 것 같은 남자의 갑갑한 마음, 그리고 지치고, 더럽고, 할퀴어진 영혼의 여정이 눈물겨웠다. 가슴 벅차게 아름다웠다.
하지만 이 책에 텍스트는 배경을 설명하는 정도로 아주 잠깐만 나온다. 그리고 모든 것은 요안나 콘세이요의 그림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마치 한 편의 영화를 본것처럼 선명하게 이야기가 흘러갔다. 그 안에 오래 전 만났던 내 안에 어린아이도 함께 있었기에 더 감동적이었다.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들 뿐 아니라 치유자들에게도 좋은 교보재가 되어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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