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여는 순간부터 인도라는 나라에 대해 오직 어렴풋하게만 알던 이미지들이, 어떤 친절한 안내나 예고 없이 곧바로 그들의 언어로 발화되며 펼쳐지는데 이를테면 카스트 제도-불가촉과 가촉민-, 발음하기 어려운 도시 이름-아예메넴, 코친, 코타얌, 케랄라- 빈디, 사리, 문두, 그리고 그들만의 호칭-코참마, 쿠티, 몰, 몬- 같은 것들이 정신없이 눈 앞에 쏟아져 내린다. 생소한 언어에 멀어있던 눈이 차분히 익숙해질 새도 없이 나선형으로 일어나는 일들의 인과관계를 읽어내기 위해 집중해야 한다. 도무지 틈을 주지 않는다. 빡빡하고 묵직하다. 물을 잔뜩 먹어 무거워질대로 무거워진 목화솜처럼, 거기에서 떨어지는 이야기의 파편들의 주워담으며 퍼즐을 맞춰나가다보면, 뭔가 굉장히 낯선 아름다움을 목격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이 책을 보다 보니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어떤 일들은 망령처럼 사람의 인생을 붙어다니며 크고 작은 영향을 주고 현재를 자꾸만 과거로 돌려놓는다. 소피 몰이 죽은 뒤, 소피 몰에 대한 '기억'은 희미해졌지만 소피 몰을 잃은 '상실감'은 점점 더 강해지고 생생해졌 듯, 그 소녀가 생전에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는 제대로 떠올릴 수 없었지만, 그들 중 아무도 소녀를 잃었던 그 날에서 평생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계가 많으면 충돌도 많아지는 법이다. 인도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무서울 정도의 보수성 때문에 이야기는 좀더 드라마틱해진다. 등장인물들은 모두라 해도 좋을 정도로 거의 대부분이 보수적인 역사에 의한 직간접적인 피해자이면서도-특히 여성들- 그것에 대항할 힘도 의지도 갖고 있지 못하다. 역사는 너무나 견고하고 깊어서 자신이 받았던 잔인한 죄의 잣대를 자신의 딸들에게 똑같이 겨누고도 잘못된 줄을 모른다. 그것 바깥에도 세상이 존재하고 누군가 그곳에 실제로 살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정하지 못하면서. 재밌는 것은 그렇게나 보수적인 사람들이 지붕에 커다란 접시를 달아놓고 그 접시를 통해 들어오는 바깥 세상의 온갖 퇴폐적인(그들 기준에서) 것들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된다는 점이다. 사리를 고상하게 차려입고 TV 앞에 앉아 폭력을 근간으로 하는 스포츠인 레슬링에 빠지고, 불륜과 무분별한 섹스가 난무하는 막장 티비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인도 노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인도라는 나라가 가지고 있는 어떤 모순을 잘 드러내주는 듯 하다.
이야기는 1970년 전후를 배경으로, 이렇게나 보수적인 공간 안에도 이념은 스며들었다. 앞에서는 카스트 철폐를 주장하지만 자신의 권리는 전혀 포기할 마음이 없는 사람들은, 뿌리깊은 역사와 부딪혀 엄청난 혼란을 일으켰다. 지주는 살해되었지만 불가촉천민도 여전히 맞아 죽었다.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두려움에 떨던 아예메넴의 파라다이스 피클 공장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서서히, 그러나 생각보다 빠르게 무너져 갔다.
읽으면서 한가지 더 재밌었던 점은 문장 안의 언어 유희들이었다. 책 자체가 우선 영어로 쓰여진 듯하고, 영어를 공용어로 구사하는 문화에서만 나올 수 있는 여러가지 말놀이가 재밌다. 할머니의 이상한 발음에 킥킥대기도 하고 동음이의에서 오는 의미의 전치를 이용해 농담같은 장난을 치기도 하는데, 그런 장난들이 영어권과 인도라는 전혀 다른 문화를 결합시키면서 이국적이고 독특한 분위기를 잘 나타내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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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가장 아름답고 애틋한 장면으로 나선형 이야기 구조를 마무리 했다. 이 비극 속에서 그래도 그 장면으로 끝을 맺었다는 것은 작게나마 희망을 남겨두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어떤 일이 남들에겐 말도 안되게 추악하고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더라도, 그 속살은 아름다웠을지 모른다. 누가 사랑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사랑받아야 하는지 계산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의 아름다움은 더욱 더 숭고해졌다. 작고 보잘 것 없는 모든 것들에도 신은 깃들어 있고, 그들만의 우주가 있다. 그것이 '큰 것'에겐 찰나의 의미없는 반짝임일 뿐일지라도, '작은 것'들에겐 영원히 꺼지지 않을 아름다움일지 모른다. 그런 것들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진정한 신봉자다운 확신을 가지고 벨리아 파펜은 쌍둥이에게 세상에는 검은 고양이 같은 건 없다고 장담했다. 우주에는 검은 고양이 모양의 구멍들만이 있을 뿐이라고.
도로 위엔 얼룩이 너무나 많았다.
우주에는 짓눌린 미튼 양 모양의 얼룩이 있었고.
우주에는 짓눌린 개구리 모양의 얼룩이 있었고.
우주에는 짓눌린 미튼 양 모양의 얼룩을 먹으려던 짓눌린 까마귀가 있었고.
우주에는 짓눌린 까마귀 모양의 얼룩을 먹은 짓눌린 개가 있었고.
깃털, 망고, 침.
코친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p.118
라헬은 레닌이 살아 있는 한 사람으로서 그녀와 에스타의 시야로 헤엄쳐 들어왔던 일을 기억했는데, 그때부터 그들은 레닌을 그 아이의 어머니가 입은 사리의 또다른 주름처럼 간주하지 않게 됐따. 그녀와 에스타는 다섯 살이었고, 레닌은 아마도 서너 살 정도였다. 그들은 베르기스 베르기스 박사(코타얌에서 가장 잘나가는 소아과 의사이자 어머니들의 몸을 더듬는 사람)의 병원에서 만났다. 라헬은 암무와 에스타(함께 가겠다고 우겼던)와 함께였다. 레닌은 그의 어머니 칼야니와 있었다. 라헬과 레닌은 둘 다 같은 증상으로, '코에 이물질을 집어넣어' 병원을 찾았었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대단한 우연이었지만 그땐 왠지 그렇게 생각지 않았었다. 어린아이가 코에 뭘 넣을지 선택하는 일에까지 어떻게 정치가 개입할 수 있을까 신기했다. 라헬은 영국 제국 곤충학자의 손녀였고, 레닌은 풀뿌리 공산당 노동자의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유리구슬을, 그는 녹두를 넣었다.
p.184-185
더 나중에도, 이날 이후 이어진 열세 점의 밤 동안에도, 본능적으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큰 것들'은 안에 도사리고 있지도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갈 곳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무것도 가진게 없었다. 미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작은 것들에 집착했다.
그들은 서로의 엉덩이에 난 개미 물린 자국을 보고 웃었다. 잎사귀 끝에서 미끄러지는 어설픈 애벌레에, 혼자서는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뒤집어진 딱정벌레에. 강에서 늘 벨루타를 찾아내어 물곤 하는 작은 물고기 한 쌍에. 유난히 더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세를 한 사마귀 한 마리에. '역사의 집'의 뒷베란다 벽의 갈라진 틈에 살며, 쓰레기들-말벌 날개 한 조각. 거미줄 일부. 먼지. 썩은 잎. 죽은 벌의 빈 흉갑-로 몸을 가려 위장하는 작은 거미 한 마리에. 차푸 탐부란, 벨루타는 그 거미를 그렇게 불렀다. '쓰레기의 신'. 어느 날 밤, 그들은 거미의 옷장에-마늘 껍질 조각을-기부했지만, 거미가 그것을 거절하고 나머지 갑옷들도 거부한 채-언짢다는 듯, 알몸으로, 콧물 같은 색깔로-나타나자 두 사람은 마음이 몹시 상했다. 그들의 옷 취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며칠 동안 거미는 심술궂게 옷을 입지 않고 자살 행위나 다름없는 상태로 지냈다. 거부한 쓰레기 껍질은, 유행이 지난 세계관처럼 그대로 세워져 있었다. 한물간 철학처럼. 그리고 부스러졌다. 조금씩 차푸 탐부란은 새로운 앙상블을 갖춰 입었다.
p.461-462
201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