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일을 쓰다가 모조리 지워버렸다. 자신의 이야기, 그것도 어렸을 적의 일을 쓴다는 것은 보통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다. 나 자신을 보호하고 싶고, 잘못의 원인을 바깥으로 돌리고 싶은 마음과도 부딪혀야 한다.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그래서 앞으로도 쭉 미워할 예정인 사람들과도 마주보아야 한다. 거기에 감정의 부스러기들을 떼고, 미화된 시간의 먼지를 털어 그대로의 것을 내보이는 일... 도무지 쉽지 않다. 쓰는 사람과 글 간에 적당한 거리 유지에 실패하게 되면, 그것은 푸념이나 하소연을 끄적인 일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김연수 작가에게 붙어서 그런지, '제과점 막내 아들'이라는 타이틀도 무척 근사하게 들린다. 지방 소도시 제과점의 막내아들이라니 어딘지 모르게 따뜻하면서도 품위있지 않은가... 당시에는 더욱 그랬겠지만, 빵은 여전히 맛있고 세련된 음식이다. 크리스마스라고 미군부대에서 사온 오너먼트들을 달고, 탈지면을 눈처럼 창가에 붙이고, 반짝이는 알전구를 거는 모습이 80년대 보통의 가정집에선 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구나 제과점집에선 키우는 개도 그 귀한 카스테라를 먹었다는데. 물론 당사자로선 이런 저런 고충이 있었을 테지만.
제과점집 막내아들로서의 모습이 잘 나와있는 '뉴욕제과점'을 비롯해서 아홉개의 단편이 하나의 책으로 묶여 있다. 작가의 고향을 연상시키는 소도시의 시장골목이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며 , 대체적으로 자전적인 내용이 많은 듯 하다.
첫번째 이야기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는 글자를 읽는 동시에 영상을 같이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눈이 함뿍 내린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제과점과, 천천히 가은선을 달리는 기차와, 발이 푹푹 빠질만큼 눈이 쌓여버린 시골마을을 잇는 배경이 무척이나 아스라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장면은 대사와 배경이 어우러져서 맘 속 어딘가 시큰한 여운을 남긴다.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에서부터 마지막까지는 어떤거 하나 콕 찝어 말할 수 없을 만큼 다 좋다. 물론 앞의 이야기들도 좋지만,「똥개는..」부터는 일단 재미가 있어서 중간에 책을 놓기가 어렵다. 특히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라는 단편은 나에게 왜 그렇게 와닿았는지 모르겠다. "물망초 여자 진짜로 사랑했습니까?" 하고 적막한 소나무 숲에서 소리높여 묻는 장면이 왜 그렇게도 좋던지. 몇 번이고 다시 돌아와 읽었다. 맘좋은 도라꾸 아저씨와 순정파 삼촌에 따박따박 대거리하는 젊은 조카 셋이 숲 속에서 만담처럼 나누는 대화 안에 뭔가 삶의 굉장히 중요한 것들이 담겨 있는 듯 하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와「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에선 지난 시대(어쩌면 지금도 별다르지 않게)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던 선동되어 정당화된 폭력성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린 아이들에게 자신의 목숨보다 '난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는 것이 옳은 행동이라고 가르치는, 지금 생각해보면 무시무시한 사상이 당연시되던 시절. 생각하지 않고 신념에 몰두하던 그 시절엔 단일화된 사상 안에서 많은 이들이 폭력에 암묵적으로 동의했었다. 다수에 속하지 못하면 때려잡아야 할 간첩 혹은 시궁쥐 취급을 받던 시절, 한가운데에서 살짝 비껴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요즘 유행하는 아재개그가 연달아 나와서 식겁했던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는, 젊은 나이에 절에 들어와 삼베 수의를 짓는 여자와 어두운 산길을 따라 여자에게 가려는 남자의 이야기다. 초파일의 부산스러우면서도 색색의 연등이 걸린 화려한 절의 모습이 눈에 그려지는 듯 선하다.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하는 지장보살의 말씀은 꼭 예정을 위한 말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김연수 작가의 유머감각, 역시 좋다. 하나만 적어보겠다.
구름 속에 숨어 있는 B, 5월 5일을 좋아하는 I, 수박에서 귀찮은 것 C, 모기가 먹는 것은 P, 당신의 머리 속엔 E, 닭이 낳은 것은 R, 밤말을 엿듣는 것은 G, 입고 빨기 쉬운 T, 기침이 나올 때는 H, 깊은 밤 골목길 조심해야 할 곳은 D,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U, 바로 너야.
작가는 이걸 쓰면서 웃었을까 궁금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아주 크게 웃고 몇 번을 따라 읽었다. 아무래도 병이 깊어진 것 같다.....
2016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