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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루인 수사의 고백
- 엘리스 피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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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 2025-06-30
: 195
엘리스 피터스의 캐드펠 수사(修士. 로마 가톨릭 수도사) 시리즈 첫 권이 나온 게 1979년입니다. 이게 한국에 번역되어 나온 건 1990년대 중반이고 그때도 북하우스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움베르코 에코의 <장미의 이름>과 비슷한 점을 떠올릴 텐데, 이 시리즈 첫 권이 <장미의...>보다 더 빠릅니다. 다만 한국에서의 번역 출간은 열린책들의 <장미의 이름>이 더 빨랐고, 1990년대 중반 북하우스가 캐드펠 전권을 출판하기로 결단 내린 건 <장미의.. >의 성공을 보고 자극받은 바 있지 않았을까 하고 제 마음대로 추측해 봅니다. 캐드펠은 주인공이나 배경이나 모두 잉글랜드(웨일즈와 바짝 붙은 서부)이지만 <장미의...>에서는 주인공 배스커빌의 윌리엄만 잉글랜드인일 뿐, 배경은 이탈리아 북부입니다.
(*문충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빈사의 할루인 수사 곁에서 에드먼드 수사는 조용히 말합니다. "정신은 어딘가 다른 곳에서 육신이라는 집이 깨끗하게 치워지기를 기다리는...(p49)" 후... 막상 아픈 사람은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도 없습니다. 극심한 고통을 보고 곁에서 공감하는 이가, 그렇게라도 대신 위안을 삼아야, 이 필멸의 인간이 그럴 만한 악행을 저질렀든, 그렇지 않았든 간에 필히 치르게 되는 이 고통스러운 과정을 두 눈 뜨고 지켜볼 수 있지 않을까, 그저 무기력하게 마음을 달랠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는 곳에 구원도 함께하기 마련이니(적어도, 현대의 신구교 주류 교리는 그렇게 가르칩니다) 구태여 성지(聖地)를 순례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p62에서 라둘푸스 수도원장에게 할루인은 죄를 씻기 위해 자신이 성지로 떠나게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라둘푸스 수도원장 아니라 우리 독자들도, 사람 상태가 이런데 대체 무슨 여행이 가능하겠냐며 만류하고 싶은 마음이 먼저일 것입니다. "의지와 용기는 충분하나, 그럴 기력이 있는지가 문제겠습니다." 캐드펠다운, 온당하고 신중한 말입니다.
애들레이즈 드 클리어리 부인(p92)... 고대나 중세에는 교통과 통신 인프라가 대단히 불완전했고, 따라서 나그네의 안전을 보장하고 적절한 환대를 베푸는 게 미덕이자 의무로까지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가 천벌을 받은 것도, 나그네를 푸대접한 죄목이 크다고도 하죠. BBC에서 만든 브라운 신부 시리즈를 보면, 펠리시아 백작부인과 매카시 아주머니가 등장하여 브라운 신부의 보조 노릇도 하고 교구의 크고작은 일을 처리합니다. 항상 평신도 중에는 이런 역이 꼭 있어야 하는데 저는 이 작에서 저 드 클리어리 부인을 보고 그 생각이 났더랬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혼인이라는 성스러운 예를 거치려면 목사건 신부건 랍비이건 뭔가 특별한 식견을 지니고 성스러운 자격을 갖춘 이가 절차를 주례해야 합니다. p150을 보면 센러드가 두 사람, 즉 두 성직자에게 누가 사제 서품을 받았는지 묻습니다. 사제가 혼배성사를 주재해야 하기 때문이죠. 카를 4세가 1356년에 반포한 금인칙서에 의해서야 비로소 천주교 사제는 교회가 독점적으로 서품할 수 있게 되지만, 그때로부터 근 백 년 전인 소설 속의 이 시대에도 민중은 이미 왕보다는 보편 교회의 권위를, 적어도 영적인 일에서는 더 높이 샀던 것입니다.
영어에 marauder라는 말이 있습니다. 전쟁의 패잔병, 혹은 혼란스러운 세상에 혼란을 틈타 약자, 여성을 기습하여 재산과 목숨, 명예를 뺏는 무리들을 말합니다. 기어이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여, 캐드펠과 센러드는 p186에서 에지타의 시신을, 차가운 눈밭에서 발견합니다. 미스테리 소설의 모범적 발걸음에 따라, 이 시신의 발견은 가뜩이나 꼬여 있던 상황의 긴장을 최고조에 달하게 이끕니다.
I have seen that face before. 캐드펠 시리즈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유독 이런 모습을 자주 보이지 않습니까? 균형잡힌 머리, 가느다란 허리... 아, 저 여인을 대체 어디서 보았더라?(p233) 캐드펠의 관록과 지혜가 폭발적인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그 미궁에 빠진 사연도 드디어 실마리를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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