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암실
빙혈 2025/05/26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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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와 암실
- 박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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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0) - 2025-05-02
: 3,420
감정이라는 것도 누구한테 배워야 하는가. 대체로 우리는 나면서부터 많은 감정을 갖고 자연스럽게 그것을 표촐합니다. 지나치게 내 감정을 강하게 표현하면 주위로부터 제재를 받기도 하는데, 그런 제재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런 행동이 윤리적이지 못하고 미성숙하며 남한테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스스로 알기 때문입니다. 이런 걸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나이를 먹고서도 매번 공공장소에서조차 큰 소리를 지르고 이렇게 해야만 본인이 무대 위 주인공이 되는 양 행복해지는 인생이라면 정말 불쌍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로사는 주인공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줍니다. 기층민중이라든가 편모슬하라든가... 저는 기층민중이라는 단어를 보고 깜짝 놀랐는데, 물론 이 개념이 동반 환기하는 그 이론체계가 설파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아무 관계 없는 소설이므로 오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아무리 어려서부터 되바라졌다 해도 아직 앤데 기층민중이 뭔지 얘가 알아봐야 뭘 얼마나 알겠으며, 읽어 보니 쥐뿔도 모르는 게 역시 맞더군요(ㅋㅋ). 그런데 얘, 즉 로사가 하려는 말 중 진짜 중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아저씨들 생각보다 별거아냐."
보통의 남자애들은 원래 아주 어렸을때부터 아저씨들이 찌질하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모르는 멍청이들도 물론 많죠). 진짜 무서운 건 돈이고 권력이며 이걸 가진 아저씨는 별로 많지도 않으며, 혹 아저씨 아니라 아줌마라도 이걸 가진 자가 무섭다는 걸 알죠. 나아가 돈이라는 게 원래 있다가도 없어진다는 사실까지 알면 세상에 그리 무서워할 건 많지 않다는 인식에도 도달합니다(조심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로사는 제법 세상 물정에 밝은 것처럼 말은 해도, 출발점이 저렇게 아저씨들에 대한 공포였으니 설령 그후에 인식이 발전했다 해도 고작 이 정도인 것입니다. 아마 어른이 되어도 멀리 가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런데, 로사는 무서운 어떤 진실을 날카롭게 캐치합니다. 한때 사장님, 대표님이었던 아저씨들이 외환위기 후에 저렇게 거지가 되어 서울역 앞에 주저앉았다는 게 중요하다고 짚은 것입니다. 뭐 이 역시, 아저씨들한테 막연한 공포감을 갖다가 제딴에는 장족의 발전, 각성을 이룬 것이지만 말입니다. 이것도 뭐 특별한 깨달음은 아니고, 아 저렇게 거지가 되었으니 별거 아니지 않느냐 이 정도죠. 진짜 똑똑한 애라면 애초에 길바닥에 나자빠지기 전부터 별게 아니라는 걸 알아봤을 텐데 말입니다. 아무튼, 작고 떼를 지어다니는 스캐빈저가 평소에는 무서울 게 없어도, 일단 상대가 무력화되었다는 점만 눈치채면 무섭게 달려드는 것처럼, 거지가 된 대표님들은 이제 이런 불량청소년을 정말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ㅋㅋ
영화 <브레이브하트>를 보면 로버트 더 브루스가 자신의 부친에게 배신당하고 격노하면서 대체 왜 윌리엄 월러스를 적 진영인 잉글랜드에게 팔아넘겼냐고 항의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부친은 "니가 이제서야 분노할 줄을 아는구나."라며 대견하다는 듯 아들을 바라봅니다. 유복한 환경에서 귀하게 자란 인생은 아마 특정 감정이 미발달하기도 하나 봅니다. 농담이고, 어떤 격렬한 원한 같은 게 있어야 마오쩌둥처럼 위기에서 근성으로 밀어붙일 줄도 안다는 소리죠. 제가 좀 특이하게 본 게, 이미 주인공은 결손가정 비슷한 환경에서 고생깨나 했는데도(물론 애를 연예인으로 키우기 위한 엄마의 일차 보호막이 있긴 했지만), 로사한테서 처음으로 특정 감정을 배워가는 대목이었습니다. 로사한테 그 감정은 매우 그 깊이가 깊은 것인데, 환경의 영향보다는 타고난 어떤 게 더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 하겠습니다.
이제 나이 사십을 바라다보는 주인공은 물론 그 모친로부터, 너무나도 출제지향적이고 물질을 밝혔던 그분으로부터 많은 상처를 받았겠지만, 또 그 모친이 너무나갔던 부분이 굉장히 크긴 했습니다만, 나이가 들어서까지 재이한테 저렇게나 감정을 이입할 필요가 뭐가 있을까 싶었습니다. 재이가 미처 모르는 그 자신의 일부까지 주인공은 샅샅이 스캔하면서 인생의 등불로 삼습니다.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요? 아빠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없었고, 엄마도 자신을 도구로밖에 여기지 않아 큰 배신감을 새삼 느꼈던 주인공의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거기까지 가 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안다고!"(p158)는 좀 그렇죠.
격렬한 증오의 대상이지만 자신에게 너무도 많은 걸 가르쳐 준 로사한테 주인공은 많은 것을 부러워합니다. 말이 술술 나오는 전달력도 그 중 하나인데, 교수 임용을 앞두고 주인공이 어려움을 겪는 대목도 여기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깊은 상처는 단순 정보 전달 이슈에서도 당사자의 발목을 잡는 것인지. 로사가 특유의 그 유창한 달변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주인공은 고전< 서스페리아>의 몇 장면과 현실을 혼동합니다. 어디까지가 가상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모를 만큼 우리는 타인들과 지나치게 밀접하게 엮이며 사는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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