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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님의 서재
  • 나를 죽이지 않는 법
  • 클랜시 마틴
  • 19,800원 (10%1,100)
  • 2025-04-02
  • : 710
이 책을 받아들고 처음에는 좀 의아한 느낌이었습니다. 살아가는 방법도 아니고 "나를 죽이지 않는 방법"이라니? 그런데 요즘처럼, 전혀 모르던 사람과도 밀도 높게 소통해야 하고, 젊은 객기에 다소 무모한 도전을 벌이다가 실패라도 겪을 일이 많은 세상이라면, 자살 충동도 뜻밖에 자주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런 충동이라는 게 신산(辛酸)을 많이 체험하고 스트레스에 크게 노출된 어른들의 문제만도 아닙니다. 치밀어오르는 자기 감정을 잘 다스릴 줄 모르는 아이들도, 느닷 닥친 쇼크 앞에서 어쩔 줄 모르고 큰일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잘 살기 위한 방법보다 먼저 배워야 할 건, 까딱 잘못해서 나를 성급히 내 스스로 죽이지 않는 방법이라는 저자의 말에 공감하게 됩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내가 마지막으로 자살을 시도했던 건 우리집 지하실이었고 나는 그때 개 목줄을 사용했다." 이 책의 머리말인 "지금의 나는 살아 있어 기쁘다" 중 p10 맨처음에 나오는 문장입니다. 이런 말을, 우리가 책을 통해 접하니 이 정도로 무덤덤하게(도) 다가오겠지만, 아무리 모든 고뇌를 극복하고 사뭇 의연, 성숙해진 마인드셋으로 꺼내는 말이라 해도, 당사자는 얼마나 참담한 기분이겠습니까. 저자 클랜시 마틴 교수님은 본인이 열 번 이상의 자살을 시도하고 그 끔찍한 체험으로부터 회복을 이뤄낸, 이른바 자살 생존자입니다. 보통 영어권에서 suicide survivor라고 하면, 자살로 생을 마친 이의 지인, 가족이 스스로를 책망하는 마음에서 쓰는 말인데, 이 경우는 자살 미수와 이후의 피폐해진 심신 회복 과정을 마친 이를 일컫는 드문 용례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요즘은 애 셋 있는 집안을 좀처럼 찾기 힘듭니다. 그런데 책 p58을 보면, 마틴 교수님은 슬하에 자녀가 무려 다섯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책을 읽다 보면, 그 시련을 딛고 일어서며 그 누구보다 "삶, 생존"의 중요성을 절감한 분이니, 가족 계획(?)이 이렇게 진행된 것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저자는 세 번 결혼하셨는데, 첫째 부인에게서 한 명, 둘째 부인에게서 두 명의 자녀를 봤습니다. 책에서는 이렇게 쓰지 않으시고 약간 우회적인 문장으로 진술하셨는데, 위트와 재치가 엿보이는 대목입나다. 독자인 제가 이 대목을 눈여겨 본 이유는, 상처로부터 그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회복되었는지를 체크할 하나의 단서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예전부터 자살을 죄악으로 간주했습니다. 신이 내린 소중한 선물인 목숨을 스스로 파괴한 자는 결코 천국에 갈 수 없으며 교회의 묘지에도 묻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 p168을 보십시오. 제임스 힐먼은 그의 1968년 저서에서 "자살 역시 인간 가능성 중 하나이며, 선택은 존중되거나 이해될 측면이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20세기의 지성답게 자살에 대해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19세기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은 <자살론>에서 "인간 자유의 궁극적 형태가 자살"이라고까지 주장했는데, 이에는 전근대적 종교의 그늘을 합리주의의 기치 하에 걷어내려는 배경도 있었던 거죠. 지금은 무슨 종교 같은 것이 사회를 지배하는 세상이 아니기 때문에, 자살은 그냥 자살로만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문은 늘 열려 있다." 이 말은 그리스도교 이전 로마 사회 지배층의 주류 사상이었던 스토이시즘 철학자들이 자살할 권리를 옹호하며 표명한 명제입니다. 저자는 그저 후세 학자들이 스토이시즘을 해석하며 도출한 사항이 아니라 그들의 원전에 이 말이 나옴을 분명히 밝힙니다. 이어 저자는 자신이 일으킨 교통사고 때문에 검거되어 단기일간 구치소에 수감된 경험을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저자는 deferred adjudication 처분을 받았다고 털어놓는데, 책에서는 친절하게 역주를 달아 이 제도가 우리나라에는 없다고 설명해 줍니다. 저도 개인적으로 십여 년 전 텍사스에 체류해서 이 제도에 대해 들은 적 있는데, 이게 미국에서도 텍사스에만 있습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검사 아니라 판사가 내리는 "기소유예" 처분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한국에선 이게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만, 미국은 기소독점주의가 아니고 대배심(grand jury)이 기소(conviction) 여부를 결정하므로 판사가 저렇게 개입할 여지가 있습니다.

스토이시즘은 로마 제국 최전성기에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갈 수 있는 데까지 올라가 본, 신선과도 같은 유한 계층에 의해 만들어진 사상이므로 요즘 사람들이 봐도 매우 쿨한 면이 있습니다. 요즘도 스위스에서 합법적 안락사를 요청하기 위해 현지 시설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부유층입니다. "살 만큼만 사는 게지혜로운 선택이다." 일견 수긍이 가기도 하지만, 사회 문제가 되는 자살은 대부분 취약 계층의 선택이거나 아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젊은이들의 경우입니다. 이런 자살은 개인에게도 비극이거니와 사회적으로도 커다란 손실입니다. 저자처럼 충분한 학식, 능력, 경험을 갖춘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파국을 면하고 건강한 일상으로 돌아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인문학적 전거가 매우 많이 쓰였기에, 자살이라는 이슈를 떠나 유능한 인문학자가 어떻게 이론을 현실에 적용하여 담론을 펴는지 배울 수 있는 아주 좋은 텍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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