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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혈님의 서재
  • 바움가트너
  • 폴 오스터
  • 16,020원 (10%890)
  • 2025-04-30
  • : 47,380
지난 34년 동안 프린스턴에서 사랑받아 온 바움가트너 교수(p81). 키는 185cm 정도이며(p72), 그에게는 이제 곁에 아내가 없습니다. 아니, 있습니다. 분명 있는데, 다만 그 연장(延長)이 이제 없을 뿐입니다.

(*책좋사의 소개로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75에 나오는 연장이라는 말은, 최고의 번역가 정영목 선생이 역주에서 설명하는 대로 데카르트가 썼던 용어입니다. l'extension이 불어 원어인데 영어로도 그냥 extension이라 씁니다. 대륙 합리주의의 완성자답게 그는 본질이 따로 있고, 그 본질이 차지하는 물리적 실체는 그저 "연장"일 뿐이라 생각했습니다. 바움가트너 교수님이 사랑하던 부인 애나는 사망했지만, 이는 단지 육신, 연장이 소멸했을 뿐 그녀는 여전히 교수님의 마음과 기억 속에 존재합니다. 그 본질이 이렇게 뚜렷이 그의 곁에 있는데 고쟉 그 "연장"이 땅에 묻혔다 한들 어찌 감히 누굴 죽었다고 평가하겠습니까.

p35에는 환지통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아마도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환상통, 유령 감각 같은 말이 더 익숙할 텐데, 영어 원어로는 phantom pain이라고 하며, 손가락이나 팔, 다리 등이 (사고 등으로) 잘려나갔는데도 여전히 그 부분에 아픔을 느끼는 현상을 뜻합니다. 물론 고통이란 실제로도 팔다리가 느끼는 게 아니라 뇌가 그리 느끼는 것이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limb에 대해 아픔이 느껴진다는 게 어쨌든신기한 일입니다. 내 팔다리란 그만큼 나한테 소중했기에 없어도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기이하게도 이게 저 데카르트적 의미에서 "연장"과도 통합니다.

바움가트너 교수에게 아내의 부재는, 잘려나간 손가락이 두뇌에 보내는 환지통과도 같으며, 교수에게는 여전히 아내가 곁에 있는 셈이기에 이걸 환상이라 부를 수도 없습니다. 역시 똑똑하신 지성인이라서 배우자의 사별로 인한 아픔도 대단히 형이상학적으로 체험하고 또 표현하시는 것 같습니다. 최고 수준의 은유적 적합성(p68)입니다. 농담이고, 소설 전반을 꿰뚫는 슬픔과 허무함은 어지간히 무딘 독자의 마음에도 환지통을 전염, 전파하기에 충분할 만큼 절절합니다. 폴 오스터 특유의 문체의 힘이며 공교롭게도 이 소설이 그의 유작이기에 더욱 페이소스의 농도가 짙습니다.

시모어 티쿰셰 바움가트너. 사실 Baumgartner라는 독일계 이름을 쓰지만 사실 할아버지는 폴란드 사람이었으며 부친 야코프(제이컵)가 아메리카에 발을 디뎠을 때 고작 여섯 살이었다고 p153에 나옵니다. 아버지는 그리 넉넉하지 못한 환경에서 살아왔고, 바움가트너 교수 역시 밀턴 프라이버그 등 진보 성향 일색인 교우관계에 싸였던 인생이었습니다. 미국에도 진보주의자들은 특히 교육 받은 이들 중에 많았으며 1939년의 독소 불가침 조약은 그들에게 어지간히 충격을 주었나 봅니다. 1950년대 매카시즘은 그들의 삶에 직접 피해를 안기기도 했습니다.

미국인 기준으로도 170cm의 키는, 더군다나 1940년대라면 여성에게 작은 키가 아닙니다. 1960년대를 풍미한 여배우 오드리 헵번도 당시에 장신이라고 했는데 저 정도입니다. 애나는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잘했고 힘도 세었던 편이지만 2차 성징이 나타나고 호르몬이 제대로 작용한 후 비교도 안 될 만큼 근육량이 늘고 강해진 남자 아이들과는 더 이상 경쟁할 수 없습니다. p46을 보면 "주제를 모르고 감히" 남자들과 육체적으로 경쟁하려 나선 애나가 잔인하게 조롱당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영목 선생이 역주에서 설명하는 대로 bite the dust는 쓰디쓴 좌절을 가리키는 관용 표현입니다. 그룹 퀸의 노래 제목도 있었죠.

하지만 프라이버그가 스페인 내전 당시 의용군에 들어가 파시스트 돼지들을 박살내려 들고 악마와 손을 잡은 스탈린을 바로 손절쳤듯이, 이들(애나의 첫사랑인 프랭키 보일도 포함)은 대체 마르크스적인 기계의 법칙과 그리 잘 맞는 심성들이 아니었습니다. 뜨거운 피가 흐르는 육신의 소중함을 알면서도 기꺼이 대의를 위해 희생하려 들기도 했죠. 그들은 본래 사람 됨됨이들이 그랬던 것입니다.

가스 검침원 에드에게 "그냥 사이라고 부르세요."라고 할 때(p15) 바움가트너 교수는 참 소탈해 보입니다. 시모어가 어떻게 Sy(사이)로 줄여지는지 이상할 수 있으나 Seymour Tecumseh Baumgartner라는 원 철자를 보면 납득이 될 것입니다. 가스 검침원은 우스꽝스럽게 긴 그리스식 성씨를 부끄러워하고 교수는 시모어가 촌스럽다고 생각하지만(이 이름은 양성적입니다), 사실 독자인 제게는 티쿰셰가 더 눈에 띄었습니다. 인디언 추장의 저 이름을 이상하게도 미국 백인들은 좋아합니다(제각각의 이유에서). 교수는 가스 검침원이 자기 이름을 잘못 읽었을 때 난도질당하는 느낌이었다지만, 사실 Baumgartner는 에드가 했듯 읽힐 가능성이 미국에서는 훨씬 크죠. 뭘 그 연세에 새삼스럽게요. p190에는 오스터(!)라는 이름이 스타니슬라프 유대인에게는 흔하다는 말도 나옵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이 소중합니까. 연장입니까, 아니면 그 이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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