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스피치 스피치
빙혈 2025/04/14 05:33
빙혈님을
차단하시겠습니까?
차단하면 사용자의 모든 글을
볼 수 없습니다.
- 이어령, 스피치 스피치
- 이어령
- 16,200원 (10%↓
900) - 2025-02-25
: 1,955
예수 그리스도는 칼로 일어선 자 칼로 망한다고 했으며, 실제로 로마 제국은 방대한 정복지를 순조롭게 다스리지 못하고 혼란 끝에 동서로 분열했습니다. 무력만으로는 기층 민중의 자발적인 순응, 충성을 이끌어내지 못함을 증명하는 유력한 사례입니다. 이 책 띠지에서 이어령 선생은 말합니다. "칼과 돈의 위력과는 달리, 말의 힘은 상대방을 스스로 무릎 꿇게 합니다." 꼭 상대방을 무릎 꿇게 하려는 목적이 아니라, 관계와 협력을 지속성 있게, 건강하게 이어가려면 위력이나 탐욕, 매수 등이 아닌 진정한 교감과 공감이 간절히 요구됩니다. 이어령 선생 3주기를 맞아 기획된 이 책에서, 강의(록)를 통해 다시 만나는 선생은, 말의 새로움과 참됨을 통해 우리 겨레가 대립을 지양하고 창조와 화합의 길로 나아갈 것을 힘차게 권유합니다.
(*책좋사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1을 보면 이어령 선생이 생전에 중앙공무원 교육 강연에서 남긴, 길면서도 통찰 가득한 명연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선생은 GND에 대해 언급하는데, grand new deal의 약자입니다. 지금까지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의 흑백논리가 이끌고 온 우리 사회라면, 이제는 각 분야에서 경계가 허물어져 모두가 융합하고 어우러져 하나가 되는, 새로운 창조와 화합의 경지가 우리 눈앞에 전개되는 것입니다. 선생은 그전부터 디지로그, 즉 정확한 측정과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된 디지털, 그리고 감성과 미학의 가치를 중시하는 아날로그의 통섭을 일찍부터 주장한 적 있습니다. 이렇게 평소부터 그 지론으로 치밀하게 완성한 고유의 담론이 단단히 구조를 구축했기에, 어디서 어떤 강연을 하셔도 일관되고 교훈적인 가르침이 가능하신 듯합니다.
이러한 창조, 즉 미증유의 생성과 화합이 가능하려면 말, 이 말이란 것의 위력에 기대어야 합니다. 말이야말로 겨레와 성원의 마음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그 안에 품고 있습니다. 이를 가리켜 선생은 워드 파워, 소프트 파워라고도 부릅니다. p126을 보면 이런 말의 힘을 전 민족과 공유하고 개개인의 창의를 분출하게 만드는 리더의 출현이 무척 절실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생은 새 밀레니엄 첫번째 베이비의 탄생을 방송에서 중계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고 자랑스럽게 밝힙니다.
사실 선생은 TV에 무척 자주 출연하셨던 편인데, 1988년 서울올림픽 개회식 당시 굴렁쇠 소년 퍼포먼스에 대해서도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열정을 다해 그 인문적 의미를 시청자들과 함께 부여했다고도 하죠. 이 강연은 전국 시장, 군수, 구청장 회의에서 펼쳐진 건데, 새천년의 불이 아직도(이 연설 당시 기준) 타고 있는 호미곶에서 이를 어떻게 운반할지를 두고 자신이 기여하신 바를 자세히 말씀합니다. 자리가 자리이니 만큼 한국 지방 행정의 경직성, 관료주의에 대해서도 은근히 일침을 가하는 선생의 의도가 느껴집니다. 그런 개방적이고 진취적이며 창조적인 정신, 영혼이 현실의 옹색함 앞에 얼마나 많은 좌절을 겪었겠습니까.
"에디슨은 최초로 빛을 이용해 영화를 만들었지만...(p156)" 괴테는 죽기 전 유언으로 "빛을, 더 많은 빛을...!"을 입밖으로 되뇌었다고 하죠. 선생이 생전에 강연과 저술에서 일관되게 강조한 포인트가 빛, 광명, 밝음과 생성의 에너지였다고 기억합니다. 만인이 화합하고 대동 공존해야 하나, 유감스럽게도 창조와 창의만큼은 원맨쇼라야 하며, 창조를 투표로 결정하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없다는 게 선생의 힘찬 논지입니다. 그래서 한자의 독(獨)과 창(創)은 자주 함께 어울리며 상호친화적입니다.
모직은 털 모(毛), 짤 직(織)을 한자로 씁니다. 그래서 단위의 길이가 짧다고 하시는데, 저는 이 대목(p201)을 읽으며 선생께서는 참 모르시는 게 없다 싶었습니다. 식물에서 뽑아내는 섬유는, 반대로 원하는 만큼 길이를 뽑아낼 수 있고, 이 식물섬유와 동물성 옷감의 싸움에서 산업혁명이 비롯했다고도 합니다. 이 강연은 인사이트 창간 10주년 포럼에서 행했다고 나오는데, 역시 선생님다운 원대한 시야가 돋보입니다. 천재이자 현인의 통찰과 진단은 이처럼 적확하고 심오합니다.
PC버전에서 작성한 글은 PC에서만 수정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