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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미안
- 헤르만 헤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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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 2025-04-25
: 210
시간과공간사에서 이제 고전을 본격적으로 시리즈화하여 펴내는 듯하여 독자로서 기대됩니다. 송용구 교수님은 시인이기도 하고 지금껏 독일권 저작들을 독자들에게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소개해 온 분입니다. 첫권이 헤세의 <데미안>이라 설렙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p37 하단에는 역주가 있는데 벌써 이런 배려가 독자에게는 가외의 레슨이 되는 것입니다. 헤세의 다른 작품 <수레바퀴 아래서>를 보면 주입식 암기 공부 때문에 지독하게 고생을 한 주인공 한스의 비참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역자의 말대로 헤세 역시 마울브론 신학교에서 이 비슷한, 혹독한 체험을 거쳤기에 작품마다 유사한 환기, 세팅이 지나가듯 등장하는데 그런 과정을 거쳐 이런 문호가 탄생했으니 공부는 설령 그 부작용이라고 해도 참 위대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는 솔직히 모든 학교는 크램스쿨이라야지, 지금처럼 죽도밥도 아닌 시스템이 최악이라는 주의입니다ㅋ. 그게 싫으면 나가서 검정고시 치면 됩니다. 그 중에 또 헤세가 나올지 누가 알겠습니까.
데미안은 p84 이하에서 기독교의 결함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습니다. 만물을 창조한 신이라면 사람한테 아름답고 선하고 거룩한 것만 보여줘야지, 조금이라도 더러운 게 있으면 모조리 사탄 타령이니 이게 얼마나 무책임하냐는 게 그 핵심입니다. 독일인들은 저 무렵 중동, 특히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고대 문물을 접하고 연구하는 데 공을 세웠으며 그 결과 전통적인 기독교 문명을 메타적으로, 시니컬하게 보는 게 크게 유행했었습니다. 헤세의 작품 곳곳에도 그 흔적이 배어나며, 다만 그것과는 별개로 소설의 이 대목 데미안의 비판은 유치하기 짝이 없는, 그저 청소년의 투정, 넋두리입니다. 우리 독자들도 지금 사춘기가 아니기 때문에, 데미안의 일장연설을 얼마든지 비판적으로 독해할 수 있습니다. 단,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에서 이반의 도도한 설파에 대해서는 그게 여전히 쉽지 않더군요.
온전히 묵살된 악마의 세계에 대해서도 대변(代辯), 혹은 어떤 해명이 필요하지 않냐는 싱클레어의 공감, 동조, 고백은 물론 충분히 이해되지만 그런 건 이 세상과 자연 속에 던져져 보면 바로 지옥의 실감이 피부로 다가오므로 따로 변설이 불필요합니다. 자연 역시 약자가 강자에게 생으로 살점이 뜯기고 심지어 암컷이 밴 태아가, 그 모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배가 갈리고 하이에나의 강한 턱과 이빨에 피투성이로 분리되는 게 정글에서는 일상으로 마주하는 바입니다. 새삼 종교다 철학이다가 뭘 번거롭게 말로 설명할 가치가 없습니다. 한 번만 구경해도 책 만 권 분량의 각성이 1나노초만에 내 정신에 입력 이식됩니다.
p106을 보면 여전히 불안정하고 자기중심적인 청소년 싱클레어의 독백이 이어집니다. 어쩔 수 없는 게 청소년 때에는 다 저런 거죠. 세상이 나를 위해 더 좋은 자리를 내어놓지 않으면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세상이 입어야 한다... 다만 헤세도 주인공 싱클레어의 생각이란 걸 저런 식으로 표현한다는 자체가, 그 미숙함을 독자 앞에 절절하게 드러내는 의도이겠습니다. 이렇게 내 마음에 파문을 던져 놓고 수습까지를 안 해 줘서 고뇌와 갈등에 빠지게 한 데미안에 대한 원망(p108), 한때 영적 구원자, 육적인 보호자로까지 고마워했던 데미안에게 이젠 이런 마음을 품으니 사람이라는 게 이처럼 얼척없고 간사합니다. 이게 다 우리 자신의 어리석고 한심한 모습입니다.
피스토리우스는 싱클레어 인생의 적절한 시기에 등장하여 적절한 충고를 해 줍니다. 아무래도 인생 연륜의 깊이가 다르니 입에서 나오는 말도 훨씬 성숙하며 그저 데미안류의 화려함이 없을 뿐입니다. 헤세의 작품에 대놓고 그런 말은 없지만 그의 이런저런 수상록을 봐도 헤세나 그의 주인공들이 가장 고뇌했던 건 육욕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헤세는 몇 살 때 어떠어떠한 여성들이 자신에게 먼저 다가와 작업을 걸었다 어쨌다는 이야기를 종종 했습니다만, 저는 남아 있는 그의 사진 같은 것을 보았을 때 과연 그런 일이 그에게 일어나기나 했을지 극히 의문스러웠습니다. 물론 지식이 많으니 말빨로 여자를 홀릴 수도 있었겠으나 헤세는 왠지 체질적으로 그런 것도 힘겨워했을 듯합니다. 사람은 그에게 결여된 걸 놓고 가장 괴로워하게 마련이며, 청소년 싱클레어 역시 그에게 제일 아쉬운 욕구가 해소가 안 되니 엉뚱한 핑계를 찾아대는 것입니다. p156 같은 데를 보면 피스토리우스가 노련하게 애를 꿰뚫어보고 딱 맞는 충고를 해 주지 않습니까.
고전은 언제 읽어도 고전만의 묵직한 울림이라는 게 있습니다. p203에서 언급되는 카발라 교도, 톨스토이 숭배 모임 같은 세팅도 읽을 때마다 새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역자의 적절한 역주가 독해에 도움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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