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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정근
- 히가시노 게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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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 2024-12-24
: 8,530
책 말미, 호소야 마사미쓰[細谷正充]의 해설이 밝히듯이 이 작품집은 일본의 학습잡지에 실린 여러 단편들을, 수정 가필을 거쳐 한 권으로 묶은 것입니다. 일본에는 아직도 5학년, 6학년 하는 식으로 특정 학년생에 특화한 (학습지 아닌) 잡지가 나오나 본데, 한국에도 이 비슷한 게 한때 있었습니다만 오래 발간되지는 않았습니다. 2003년에 출판되었던 책이며, 그래서 평론가 호소야 씨가 히가시노 게이고에 대해 "변화구가 다양하지만 결정구가 아쉽다"라는 평이 한때 있었다는 언급을 하는 건데, 만약 지금이라면 아예 이런 말 자체가 안 나올 것입니다.
(*책좋사 카페의 소개를 통해 출판사에서 제공한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주관적으로 작성한 후기입니다)
여섯 본편의 1인칭 화자, 주인공은 같은 사람이며 다른 환경에 처해 다른 사건들을 해결하는데, 학교를 옮겨다니는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비상근"이란 설정을 넣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각기 다른 비상근 교사라고 해도 무방하며, 이 책은 장편이라기보다 단편집으로 보는 게 맞겠습니다. 20세기 초중반 영미의 추리 장르에서 감정을 개입하지 않고 시크하게 사건을 해결하는 탐정물이 유행하여 이걸 하드보일드라 불렀는데 이 책 제목에 든 "非情"은 그를 염두에 둔 듯합니다. 스승의 바른 길이니 뭐니 하며 학생들에게 과하게 가까이 다가가진 않겠다는 건데, 해설에서 평론가 호소야 씨도 그런 취지로 말하지만 작품을 읽어 보면 막상 주인공은 다정한 사람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다정하기만 하고 합리적인 판단을 못하는 교사라면 학생들에게 결과적으로 더 해로운 존재일 텐데, 비정규직치고는 지나치게(?) 예리한 두뇌의 주인공인지라 독자에게는 더 살갑고 고맙게 다가오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본어에서는 한자에 다양한 발음이 구현되지 않기에 동음이의어가 많습니다. 비상근(非常勤)이나 비정근(非情勤. 작가가 만들어낸 말입니다)이나 둘 다 일본어로는 독음이 [비죠-킨]이니 일종의 말장난입니다. p54:6을 보면 후지와라 선생의 발언 의도에 대해 주인공이 "비상근이라 정이 없다는 뜻인가요?"라고 짚는 대목이 있는데, 한국어로는 이 말의 재미가 전달되기 어렵습니다. 정확히는, 임시직으로 일하는 이상 과한 소속감을 두지 않겠다는 거지 정말로 비정하게 굴겠다는 뜻이 아니며 천성적으로 고립감을 즐기는 주인공의 스타일도 한몫합니다.
여섯 편의 미스테리를 해결하는 주인공의 실력을 보면 대체 이런 사람이 왜 고작 비정규직으로 박봉의 신세에 머무는지가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독자는 특히, 심각한 사건이 품은 미스테리의 대단히 빈약한 단서만 갖고도 마치 코난처럼 가뿐하고 우아하며 논리적으로 진상을 꿰뚫어보는 주인공의 안목과 통찰력에 경악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고작 이걸 갖고..?" 그런데 우리의 일상에서도, 살인이나 중상(重傷)처럼 심각한 결과가 아니었다뿐이지 대체 왜 이런 상황이 빚어졌는지 이해가 도통 안 되는 일은 자주 벌어집니다. 우리도 이 비상근 교사처럼, 과한 감정적 집착을 버리고 필요한 부분에만 집중하면, 그런 수수께끼들을 다 풀어낼 수 있었을까요? 전 그 점이 새삼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우리의 해결을 기다리던 말썽이나 사고는 우리의 무능으로 인해 부당히 잊히거나 그냥 묻어간 게 그간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정의(正義)는 그때마다 일일이 훼손되었겠고 말입니다.
두번째 작품 <64분의 1>에서, 사실 중2(초5라기보다) 수준의 수학 확률만 제대로 배워도 64가 2의 6제곱이라는 사실로부터 대략 이게 무슨 성질의 숫자인지는 감이 옵니다. 그 여학생들(p49)이 수업 시간에 배우는 독립시행의 확률곱에 대해서는 까막눈이라도, 내가 돈을 걸고 재미를 보려는 도박이 관심사가 된다면 갑자기 까다로운 계산도 척척 해내게 되나 봅니다. 첫째 작품에서는 이른바 다잉 메시지가 등장하는데 사실 영미권에서는 이런 이상한 말을 쓰지 않습니다. 이 클리셰 자체는 영미의 장르에서 처음 만들어졌어도 말입니다. 호소야 평론가도 그런 취지로 말하지만 다잉 메시지란 장르문학에서나 등장할 뿐 대단히 비현실적입니다. 범인이야 그 뜻을 이해했건 못했건 현장에서 인멸해 버리는 게 절대우위전략이고, 만약 범인이 메시지의 존재를 모르겠다 싶으면 피해자는 (힘이 남은 한) 직설적으로 할 말을 남기면 그만이죠. 그래도 우리 장르팬들은 마술쇼를 찾은 관객들처럼 즐겁게 속고 디테일의 정성에 감동합니다.
일본의 표음수단 가나는 한자의 변형, 간이화를 통해 오랜 세월에 걸쳐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한자와 형태가 부분적으로 겹치는 게 많고, 가나 몇을 적당히 합치면 특정 한자가 나오거나, 반대로 한자를 적당히 파자(破字)하면 특정 가나 몇 개가 나오기도(그렇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 단편들의 트릭은 대부분 글자 구성 유희의 묘미에 기대는데 이렇게 하는 게 아마 초등 고학년들에게 교육적으로도 유익하겠다고 작가가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코난에서도 브라운 박사(아가사 하카세)가 이런 트릭을 쓴 농담을 자주 합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지만 아무리 비정(非情)의 컨셉을 써도 그 착한 마음, 주제의식이 절로 삐져나오는 걸 도무지 막을 수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과 동정, 정의감은 그 내면에 상근(常勤) 중이라는 점, 이 작가는 언제나 강조하지 않고 못배긴다는 걸 우리 한국 팬들도 다 잘 알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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