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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대가리님의 서재
  •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 존 카터 코벨
  • 22,500원 (10%1,250)
  • 2008-06-10
  • : 646
조정육 선생님의 마지막 강의를 들었다. 사실 그동안 강의를 소화하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특히 오늘 강의는 좀더 어려웠다. 회화도 잘 모르는데, 그것도 생소한 동양화인데, 게다가 오늘은 일본 회화라니! 선생님의 설명을 통해 일본 에도(江戶)시대의 역사적, 문화적 상황을 대략적으로 이해는 하였으나 리뷰를 쓰기에는 아는 게 너무 없었다. 그래서 도서관에서 찾은 책이 『에도시대의 일본미술』(크리스틴 구스 저, 예경, 2004). 그러나 이 책 주변에 꽂혀져 있는 책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 글을읽다, 2008). 어라, 저자가 외국인이네? 미국 태생의 동양미술사학자로 컬럼비아대학에서 일본미술사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뒤늦게 일본문화의 근원으로서 한국문화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했으며 한국문화에 대한 1천 4백여 편의 논문과 5권의 영문 저서를 냈다는 이력이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번 강의를 들으면서 한ᆞ중ᆞ일 문화의 차이점에 대해 궁금했던 차에 서문을 읽기 시작했는데 처음부터 충격이었다. 좀 길게 인용하겠다.
 
한국의 문화재가 일본에 많이 가 있는 것처럼 이집트의 문화재는 런던에, 일본의 문화재는 보스턴에 많이 가 있다. 그러나 다른 것은 런던에 있는 이집트 문화재는 처음부터 이집트 것으로, 일본 것은 일본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반해 일본에 가 있는 한국 문화재만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일본 작품, 혹은 중국 것으로 왜곡돼 인식되고 있어서 이제 와서 한국이란 근원을 찾는 작업은 지극히 어렵고도 미묘한 문제가 되었다.
어째서 일본은 그들이 한국문화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그토록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러한 사실이 놀랍기 그지없다. 일본 내의 박물관장들은 아무도 한국에서 교육을 받지 않았다. 유교가 지배적인 일본에서 그 누구도 오래 전부터 일본 것으로 치부해놓은 예술품의 분류가 부정확할 뿐더러 국수주의적 행태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 해서 일본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행동을 저지르려고 하지 못했다. 또는 1981년 현재 한국의 모든 박물관장은 일본식 훈련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 때문인지 “일본 내의 많은 예술품들이 사실상 한국 것임에도 그렇지 않은 것처럼 잘못 알려져 있다. 이들이 한국 것임을 제대로 밝혀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밝혀서 ‘풍파를 일으키지 않으려’한다.
그렇지만 무엇 때문에 한국의 학계(1981년 현재)는 그렇게 소극적인가? 지금의 나이든 학자들은 과거 일본사람 밑에서 공부했기에 그들에 대한 무슨 의리나 의무 같은 게 있어서 그러는 것인가? 아직 서른이 안된 젊은 학도들은 누구에게도 빚진 것 없을 테니까 이들은 박차고 일어나 진실을 밝혀서 케케묵은 주장을 일소해버렸으면 한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앨런 코벨(카터 코벨의 아들)도 한국사를 연구하는 중인데 한국이 초기 일본역사에 미친 확고한 영향의 여러가지 내용을 증명해낼 작정이다. 그가 힘을 내서 이 일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나는 때때로 독자들로부터 두 나라 사이의 문화적 관계가 항상 그렇게 한국에서 일본으로 ‘일방적 흐름’만 계속되었던 것인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 그렇다. 그 흐름은 사실상 99퍼센트까지 한국에서 일본으로 가는 일방적 흐름으로 지속되었으며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화가 및 건축가 그리고 도공들을 통해서 그 영향이 나타났다. 그 반대 방향의 물결의 최초로 흐르게 된 것은 20세기 초의 일로서 도쿄의 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많은 한국화가들이 일본식 구도에 일본식 색채를 사용한 현상으로 나타났다. 당신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였으므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위 글이 한국인이 아닌 미국인이 썼다는 게 믿겨지지 않았다. 너무 창피했다. 한국은 아직도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았고 그 후손들이 여전히 이 나라를 장악하고 있다는 슬픔 현실을 새삼 떠올리면서. 2008년 한국어판 출간 시 아들 앨런이 전하는 어머니 존의 말을 더 인용하겠다.
 
 한국인은 그 나름의 단점에도 불구하고 진실로 순수한 사람들이다. 일본에서는 내가 아무리 일본어를 잘하고 일본역사와 문화에 정통해 있어도 그들과 동화되기가 어려웠다. 여기 한국에서는 내가 진실로 따뜻하게 맞아들여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의 그런 마음은 순수한 데서 온 것임을 나는 알 수 있다. :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한국인의 조상 부여족의 실체를 파헤쳐 그들의 에너지를 이어받는 것이야말로, 오랜 기간 지속된 유교의 침체된 분위기보다 한국의 미래를 확실하게 해 줄 힘의 원천이 될 것이다.
 
 이 책의 목차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져있다.
 
제1장 한국 무속과 일본 신토
제2장 백제의 불교 전파 – 아스카 불교문화
제3장 백제미술의 보고, 호류지
제4장 꽃피어난 문화
제5장 한국에서 사라진 고려불화
제6장 일본으로 간 조선화가들
제7장 15세기 교토의 한국센터, 다이토쿠지
제8장 한국예술 되살리기
 
 편역자 김유경씨가 후기에서 말한 것처럼, 존 카터 코벨이 “한국인에게 아무것도 바라지도 않고 받은 것도 없이, 이만한 학문을 이룬 그의 업적”에 경의를 표한다. 조정육 선생님께서 기회가 된다면 고려 불화에 대한 강의를 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을 읽으면서 고려 불화에 대한 탁월함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려 불화는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에 있다. 고려 불화를 통해 조정육 선생님을 다시 만나 뵐 수 있기를 바라며 그동안 동양화에 문외한(門外漢)이었던 사람이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끔 이끌어 주신 데대해 깊은 감사를 드린다.
 
 끝으로 존이 목조(木造) 구다라(百濟)관음과 구세관음에 대해 백제 것임을 논증하면서 나온 내용 일부와 사진, 이와 관련된 신문 기사를 소개한다.
   
 백제는 모든 힘을 불교 진흥에 쏟고 국방을 소홀히 한 나머지 패망하였다. 그러나 그 정신은 일본으로 건너가 호류지의 건출술이나 구다라관음(百濟觀音), 몽전(夢殿)의 구세관음(救世觀音), 사천왕상 그리고 하늘을 향해 우아하게 치켜 올려진 금당(金堂)의 정교한 지붕선 등에 오늘날까기 살아남아 온 세계 사람들의 격찬을 받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각국의 여행자들은 호류지를 보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종교 건축물'이라고 감탄하지만 사실상 그 무사의 아름다움이 백제의 손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아는 사람은 없다.
 오늘날 대부분의 한국인들조차 백제가 6세기 중엽 일본에 불교를 처음 가르쳐 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뒤 1세기 반에 걸쳐 일본 땅에 불교를 일으키기 위해 돈과 사람과 기술을 보내어 막중한 도움을 주었던 사실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일본이늘이 '고대 불교문화의 영화'라고 향수 어린 감정으로 회고하는 것이 사실은 다름 아닌 백제 땅에서 꽃피웠던 불교문화의 그림자라는 사실도 깨닫지 못하고 있다(p.81).
 
 호류지의 모든 비밀행정, 쇼토쿠 태자와 스코이 여왕의 전 재위 기간은 의심할 여지없이 한국의 예술과 문화가 씨줄과 날줄로 얽혀 복잡하게 짜인 시대였으며 예술적 영감의 원천을 구하거나 실제로 만들어지는 데 엄청난 의지가 되었던 시대였다. 백제예술을 알기 위해선 반드시 감식안을 가지고 호류지를 가봐야 한다. 그곳 문화재 표지에 기록된 사항이 어떻게 왜곡된 것이든, 혹은 아예 표지조차 붙어 있지 않더라도 그런 것에 개의치 말고 자신의 감식안을 통해 보아야 한다. 비록 한국 땅은 아니라 해도 거기에 몇 세기를 지나고도 찬란한 빛을 발하는 한국의 문화유산이 있는 것이다(p.117).
 
   
▶구다라관음
  


 
▶구세관음
 

출처 : 독서대학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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