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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대가리님의 서재
  • 조선의 풍속을 그린 천재화가 김홍도
  • 최석태
  • 8,550원 (10%470)
  • 2001-01-15
  • : 2,113

『그림공부, 사람공부』의 저자 조정육 선생님께서 5000년 우리민족 역사 상 가장 위대한 화가라고 극찬한 김홍도의 삶과 작품을 『조선의 풍속을 그린 천재 화가 김홍도』(최석태, 아이세움, 2001)을 중심으로 요약해 보았습니다.

조선시대에는 두 차례의 절정기가 있었습니다. <꿈 속에 노닌 복숭아밭 夢遊桃源圖> 그림으로 이름난 안견과 흐르는 물을 보는 남자를 그린 선비 화가 강희안이 활동한 시기, 즉 세종대왕 시기가 그 하나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금강산 그림으로 유명한 정선과 우리가 살펴보려는 김홍도가 활약한 시대로, 숙종 임금에서 비롯되어 영조와 정조대왕 시대에 그 정점에 이른 때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앞 시대에는 사대부에서 직업 화가인 화원에 이르기까지 중국식 산수화와 인물화, 매화와 대 그림이 성행했다면, 뒷 시기는 우리 땅 풍경을 직접 관찰하여 그리는 사경, 우리네 삶의 모습을 그린 풍속화 등 서민 취미가 두드러지는 특징을 보입니다.


김홍도는 1745년,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8살 무렵 강세황의 집에 드나들며 그림뿐만 아니라 시·글씨·독서교육을 받고 10대 무렵에는 김응환에게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워 20세 전에 도화서의 화원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21세에 <경현당 수작도 연병(景賢堂受爵宴圖屛)>을 그린 후 명성이 높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영조 임금이 왕위에 오른 지 40년이 된 것과 일흔 살의 장수를 기념하여 연 행사를 그린 것입니다.

<경현당 수작도 연병>

28세에 영희전을 다시 지으면서 그림 그리는 일에 참여한 화원 15명의 대표로 나올 정도로 두각을 나타냈으며 29세에 영조와 훗날 정조의 초상화 그리는 일에 5명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32세에 <군선도(群仙圖)>를 그렸고 정조에게 <규장각도(奎章閣圖)>를 그려 바쳤습니다. 
 


<群仙圖>


<奎章閣圖>

37세에는 정조의 초상을 그리는 작업에 참여하였고 38년에 스승 강세황과 함께 호랑이 그림을 그렸습니다. 
 

 
<송하맹호도(松下猛虎圖))>              <표피도(豹皮圖)>

<표피도>에 대해 손철주(미술 칼럼니스트•학고재 주간)는 다음과 같은 글을 썼습니다.
니은 디귿 이응 그리고 이 아 으…. 한글 자모를 뒤섞어 놓은 듯한 그림, 도대체 무엇인가. 돋보기를 대고 보면 자세하다. 자모 사이사이에 잔털이 촘촘하다. 아랫부분에 마주보는 기역 자는 눈썹이고, 밑에 둥그스름한 부분은 눈자위다.
맞다, 표범이다. 표범이긴 한데 껍질 그림이다. 단원 김홍도의 이 그림 참 대단하다. 평양 조선미술박물관이 소장한 북한의 국보다. 터럭 한 올 한 올 다 그리려고 만 번이 넘는 잔 붓질을 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보꾹 그림을 그리다 등이 활처럼 굽었다. 짐작컨대 단원은 눈알이 빠질 지경이었을 테다.
그 고역을 치르며 표범 가죽을 구태여 그린 이유가 뭘까. 가죽은 한자로 ‘혁(革)’이다. ‘혁’은 또 고치고 바꾼다는 뜻이다. 표범은 철따라 털갈이한다. 무늬가 크고 뚜렷해진다. ‘군자표변’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다. 군자는 표범이 털갈이하듯 선명하게 변한다. 선비인들 다르랴. 사흘만 안 봐도 눈 비비고 볼 상대로 바뀐다. 그것이 ‘괄목상대’다.
새해가 되면 다들 마음먹이를 다시 한다. 해도 군자나 선비가 못 되는 이는 ‘작심삼일’이다. 단원은 오종종한 인간을 꾸짖는다. 인두겁을 써도 표범 가죽 쓴 듯 행세하라.



<황묘롱접도(黃猫弄蝶圖))>



<황묘롱접도> 중 일부


<선면 협접도 (扇面 蛺蝶圖)>

부채에 씌어진 글씨는 다음과 같습니다.
석초 : 나비가 비스듬히 날며 날개를 편치 모양새도 좋지만 색깔은 천연의 빛을 어찌 얻었을까?
글쓴이 모르는 글 : 즐겁게 훨훨 날던 장자의 꿈 속의 나비가 어찌해 부채 위에 더 올랐느냐.
강세황 : 나비가루가 손에 묻을 듯하니 사람의 솜씨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빼앗았다.

1783년, 39세 되던 해 우수한 화원을 따로 뽑아 운영하는 자비대령 화원제도가 시작되었으나 여기서 특별히 열외되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44세에 정조의 명령으로 금강산과 그 주변의 경치를 그리기 위해 김응환과 여행을 하고 45세에 영남 지방의 명산을 다니며 그림을 그립니다.


김홍도의 <총석정>


김홍도의 ≪금강산 해산첩≫ 중 <총석정>


정선의 <총석정> 
 

  

이인문의 <총석정>


이재관의 <총석정>

강원도(북한) 통천군 통천읍에는 총석정(叢石亭)이 있습니다. 총석정은 동팔경(關東八景)의 하나로, 주위에 현무암으로 된 여러 개의 돌기둥이 바다 가운데에 솟아 있어 절경을 이루지요. 그래서 이를 그림으로 그린 화가가 많습니다. 특히 정선은 여러 점의 작품이 남아 있고, 김홍도, 이인문, 이재관, 허필, 김하종 등이 즐겨 그렸습니다.
똑같이 총석정을 보고 그린 그림이지만 가장 많이 그린 정선의 작품을 보면 일절 색을 쓰지 않은 채 오로지 수묵만으로 물결치는 파도를 그렸으며 김홍도는 파도소리에 새소리까지 들릴 듯 섬세하고 정감있게 그렸지요. 그런가 하면 초상화를 잘 그린 이재관은 얌전하고 꼼꼼한 모습으로 총석정을 그립니다. 하지만 이인문(1745-1821) 은 김홍도만큼은 알려지지 않은 동시대 화가로 주눅 들지 않은 자신만의 색채를 표현해 수채화처럼 총석정을 그렸다는 평을 받습니다.
이처럼 유명한 화가이든 무명화가이든 나름대로 특징을 살려 그린 총석정은 그래서 더 흥미로운지 모릅니다. 그림에서도 정선이나 김홍도 같은 당대 최고의 화가들만 있다면 재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장미꽃이나 백합 같은 한두 종의 꽃만 피어있는 정원과 같겠지요. 다양한 개성과 자신만의 색깔로 그린 총석정을 지금은 갈 수 없지만 언젠가 찾아가 파도치는 정자에 서면 붓으로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노래한 화가들을 기억하게 될 것입니다.
<조정육의 행복한 그림읽기> 중에서

46세에 1년 내내 경기도 화성의 용주사에 필요한 그림 그리기에 매달려 걸개 그림 <삼세여래>와 <칠성여래사방칠성>을 그립니다. 47세에 스승 강세황이 죽습니다. 48세에는 아들 김양기를 얻습니다.

52세에 걸작으로 평가되는 <절세보첩>을 그리고 53세에 <오륜행실도>라는 판화를 제작합니다.

1800년, 56세에 정조에게 주자의 시 내용을 여덟폭의 병풍으로 그려 바치며 이 해에 정조임금은 갑자기 죽습니다.

58세에 자신을 농사짓는 늙은이라 쓰며 60세에 처음으로 규장각의 자비대령 화원으로 시험을 치릅니다. 정조의 죽음으로 경제적인 후원자였던 김한태도 죽임을 당하였고 그로 인해 어려운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김홍도필 추성부도(金弘道筆 秋聲賦圖)

1805년의 끝자락인 동지 무렵에 가로 2미터가 좀 넘게 그린 <추성부도>는 김홍도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대작입니다. 그림 가운데는 한 선비가 둥근 창을 대다보면 앉아 있고, 심부름 하는 어린아이가 한 손으로 무언가를 가리키면서 그에게 말을 걸고 있습니다.
왼쪽 위에서 아래로 늘여 쓴 글은 1000년 전쯤의 중금 송나라 구양수(1007~1072)가 지은 <추성부>입니다. 늙어 죽을 날이 멀지 않은 구양수가 가을 밤 홀로 책을 읽다가 기묘한 소리를 듣고서 심부름 하는 아이를 내보냈는데, 아이가 뜰에서 허공을 가리키며 “별과 달이 환히 빛날 뿐 어디에도 사람 흔적은 없고, 소리는 나무 사이에서 납니다” 라고 말하는 내용입니다. 이어서 구양수의 가을과 인생의 슬픔을 말한 내용이 나옵니다. 김홍도는 이 글이 지닌 느낌을 그림으로 표현했습니다. 옛글이 김홍도라는 개인의 사색에 완전히 녹아 들어가서 그림과 하나가 되어 나온 것같이 느껴집니다. 김홍도는 자신의 죽음을 비로소 예견한 것일까요? 이 그림이 제작연도가 분명한 김홍도의 작품 가운데 맨 마지막 것입니다.

출처 : 르네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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