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책들이 온 서점을 가득가득 메우고, 왠만큼 영화에 대해 안다는 사람들은 너나없이 영화관련 책을 내는 것이 유행이다. 어짜피 대중문화라는 것이 적당히 애매하면서도 누구나도 알 만큼 눈높이를 낮춰야 생명력을 지니는 것이겠지만 문제는 양이 질을 누르는 현상에 있다. "소문난 잔치집에 먹을 것이 없다"는 속담이나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그레샴의 법칙은 이런 것을 지적하는 표현아니겠는가?
개인적으로는 영화를 전공하는 것도 아니고 특별한 지식이 있는 편도 아닌, 이미지보다 활자에 익숙한 C급 관객에 불과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들을 통해 귀동냥으로 보고 듣고 하다보니 영화라는 매체가 주는 매력에 어느새 서서히 중독이 되어가는 것 같다. 영화보는 것만큼이나 영화이야기를 담은 책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올해는 유난히도 좋은 영화관련 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다.
영화에 담긴 클래식에 관한 책, 영화가 차용한 그림에 관한 책, 사진이 영화에 어떤 식으로 스며들어 있는 가를 이야기해 주는 책 등, 종합예술로서 영화의 면목을 드러내는 좋은 책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이 방면에 관심있는 이들을 즐겁게 한다.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의 땀이 배인 종합예술이고 산업이다. 문학, 음악, 미술, 사진 등 온갖 영역의 기존 예술장르를 흡수하면서 동시에 이를 표현하는 각종의 기술이 요구되고, 최종적으로 관객에 다가서기 위해서는 다시 스크린과 마케팅라는 환경과 비지니스가 필요하다. 따라서 좋은 영화를 보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꿈을 흡수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엇보다도 영화는 '이미지'라는 탁월한 표현수단을 보유하고 있지만 역시 좋은 영화는 그 바탕이 되는 '이야기'(서사)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아득한 시절부터 내려온 '이야기'에 음악과 미술, 기술과 경영이 결합되어 움직이고 보이는 '이야기'가 바로 '영화'이지 않는가. 좋은 문학작품(이야기)을 바탕으로 훌륭한 영화들이 다수 제작되었고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바로 그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흐르고 상황이 변한다해도 이야기는 전해지는 것이고 말하기와 글쓰기는 인간의 생존에 있어 절대적인 수단이다. 결국 한 인간을 평가하는 방식은 그의 말과 글을 통할 수 밖에 없고, 좋은 말과 글은 인격을 드러내는 방법일 뿐 아니라 생존을 좌우하는 도구가 되기까지 이르렀다.
옛부터 '신언서판'이라해서 말과 글이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듯이 이제는 기업의 입사에 있어서도 얼마나 논리적인 사고를 할 능력이 있는지가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었다. 또 한국의 대부분 고등학생이 겪어야 하는 대학입시에서도 <논술>의 비중이 점점 더 중요하게 된 것이다. 최근 모 출판사의 세계명작 시리즈가 홈쇼핑을 통해 불티나게 팔리고 있고 그 주 수요층이 고교생 자녀를 가진 강남의 아주머니들이라는 것은 좋은 문학작품(이야기)를 읽는 것이 결국 논술의 최고 대응책이라는 점이 인식되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현실을 감안할 때, 이번에 출판된 백건영의 <논술, 영화에게 길을 묻다>는 시기적으로 적절한 처방이기라고 생각된다. 올해 나온 좋은 영화관련 책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영화를 사랑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것이겠지만 어쩔 수 없이 가장 목표로 하는 대상(집단)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애초 부터 자기의 주 독자층을 논술에 힘겨워하고 낯설어 하는 중고생들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 재미있어하고 생각할 거리들을 가진 영화들을 잘 선택해서 가정과 가족, 환경과 인류의 미래, 정보화 시대의 불신과 음모, 미디어 권력과 인권, 성폭력과 여성인권, 사형제도와 인간존엄, 스포츠, 분단과 통일에, 전쟁, 직업, 노령화, 집, 소수자와 같은 시의적절한 주제들에 맵시있게 버무려 놓았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이야기들은 어떤 것이라도 많은 생각거리들과 논리적인 구성을 갖추고 있겠지만 이를 영화라는 대중적이고 흥미로운 내용에 바탕해서 시사적이고 수험적합한 주제들에 맞춰 재구성한 책은 아마 처음이 아닌가 싶다. 당장 황우석 박사의 배아복제가 문제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인간 배아복제와 생명존중을 마이클 베이 감독의 <아일랜드>(2005)을 바탕으로 분석하는 내용을 어디서 그리 쉽게 찾을 수 있겠는가?
특히 시간이 많지 않는 학생들이라면 이 책에 실린 영화들과 설명을 바탕으로 논술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효율적 투자" 라고 보여진다.
저자는 이미 블로그를 통해 영화에 대한 폭넓은 지식과 애정에 기반한 글쓰기로 많은 이웃들을 거느리고 있는데 자신의 첫 책을 영화를 통한 논술에 헌정함으로써 이 낯선 분야를 새로이 개척하는 호기심을 보여주는 것 같다. 새로운 길 앞에 놓여 있을지 모를 암초와 복병을 각오한 저자의 용기에 격려를 보내고, 수험생들에게는 이 책을 통해 재미와 합격이라는 두마리 토끼를 다 잡는 행운을 누리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