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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개혁과 혁명의 문제, 최종 목표와 운동의 문제는 다른 측면에서 볼 때 노동운동의 소부르주아적 성격이냐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이냐에 관한 문제인 것이다(SR 13).


베른슈타인은 계급의 관점을 떠나면서 정치적 나침반을 잃어버렸다(SR 109). … 베른슈타인은 시민이라는 말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즉 인간 그 자체로 이해하는데, 실제로 그에게는 인간 그 자체가 부르주아로, 인간 사회가 부르주아 사회와 같은 것이 되었다(SR 112).


SR - Sozialrefrom oder Revolution?, 『사회개혁이냐 혁명이냐』, 김경미·송병헌 옮김, 책세상(책세상문고·고전의 세계 005), 2002년

E - Empire, 『제국』, Antonio Negri &Michael Hardt, 윤수종 옮김, 이학사, 2001

M - Multitude, Antonio Negri &Michael Hardt, 2004, Penguin Press


1. 베른슈타인의 방법

2. 자본주의의 적응

3. 사회개혁을 통한 사회주의의 도입

4. 관세정책과 군국주의

5. 이론의 실천적 결과와 일반적 성격


이 논문은 1890년대 말에 치열하게 펼쳐진 독일 사민당 내부의 수정주의 논쟁의 판세를 결정지은 뛰어난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로자는 베른슈타인과 그의 수정주의를 쁘띠부르주아의 전형적인 양태로 간주하며 수정주의자들이 프롤레타리아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그야말로 베른슈타인은 개발살난 것이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의 승리는 독일 사민당 내에서의 그녀의 정치적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다. 오히려 승리한 것은 베른슈타인이었고 로자는 1918년 1월 스파르타쿠스단의 봉기때 우파 민병대에게 살해당해 베를린의 한 운하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녀의 사체는 같은 해 5월에 건져졌으나 그녀의 관점은 1968년에 있었던 1848년 이후에 발생한 다중 최대의 변동이 일어날 때 까지 운하 바닥에 처박혀있던 것 같다.


SR Ⅰ: 적응과 개혁 - 사회주의의 토포스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룩셈부르크에 따르면 베른슈타인은 사회주의에서 토포스를 제거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사회주의의 과학적 기초는 자본주의 발전의 다음 세 가지 결과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으로 몰락을 불가피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경제의 증가하는 무정부성, 둘째 미래 사회 질서의 긍정적 맹아를 창출하는 생산 과정의 사회화의 증대, 셋째 다가올 변혁의 실천적 요소를 형성하는 프롤레타리아의 증가하는 힘과 계급의식이 그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제거하고 있는 것은 이른바 과학적 사회주의의 근본지주 가운데 첫 번째이다(SR 21).


로자는 베른슈타인이 사회주의 혁명의 독특한 토포스를 소멸시키고 그 대신 자본주의의 토포스를 영속적인 것으로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자본주의 발전 진로에 대한 베른슈타인의 견해가 옳다면, 사회주의적 사회 변혁은 하나의 유토피아가 된다." 따라서 이 논문에서 로자의 과제는 사회주의 혁명의 토포스를 다시 확립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의 토포스를 사회주의 혁명의 토포스로 배치시켜내는 것이다. "반대로 사회주의가 결코 유토피아일 수 없다면, ‘적응 수단’에 관한 이론은 잘못된 것이다(이상 SR 25).“


# 자본주의의 영속적 토포스를 둘러싸고


* 적응

자본주의의 대표적인 적응 수단은 신용, 통신과 교통수단의 발전, 그리고 자본가 집단이다. 여기서 신용과 통신-교통수단의 발전 사이에는 정확히 비례관계가 성립한다. 통신-교통수단은 근본적으로 고정자본의 규모를 결정하며 이 고정자본의 규모는 근본적으로 총실물경제량을 결정하며 이것은 바로 신용으로 인해 발생하게되는 화폐가치를 포함한 전지구의 총화폐가치가 이루는 무한등비급수의 초항이기 때문이다. 물론 신용을 통한 금융소득의 1투자당 증가율이 100%를 상회한다면 이는 화폐량이 무한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이 경우 화폐량 역시 무한히 증가하게 되어  물리적으로 제한된 실물과의 연관을 초인플레이션의 형태로 점차 잃어가게 될 것이다. 따라서 금융소득의 1투자당 평균증가율은 반드시 100% 미만이어야 한다. 그리고 고정자본은 본질적으로 유한하므로 이 경우 총화폐량은 유한하다. 유한수 사이에는 비례가 성립 가능하므로 정상적인 경우 무한등비급수의 초항 즉 총실물경제량 R와 총화폐량 C, 1투자당 평균증가율(=[투자후 금액/원금]-1) I 사이에는 이런 비례가 성립된다. ∴ C=(R/1-I)

물론 I가 1보다 커지는 순간 즉 순수 금융위기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까지 목격한 자본주의 위기는 실현 불가능성에 의한 위기였다. 물론 이 경우에도 신용은 생산이 자본으로 실현 불가능할 정도로 막대하게 폭증하도록 부추기는 역할을 한다. 이렇게 신용은 스스로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부풀리는 경향이 있으며 그에 따라 자본주의를 위기로 몰아세운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에 가장 먼저 포기되는 것은 역시 신용이다. 채무불이행 선언. 국민국가들의 채무불이행 선언은 그것이 매우 국지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세계 금융 질서가 감당 가능한 것에 불과했다. 따라서 채무불이행 국가의 재건은 세계 금융 질서를 보증하는 결국에는 정치적 질서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줄 뿐이지 신용의 근본적 불안정성에 대한 반박이 될 수 없다. 신용은 근본적으로 순수 금융위기의 가능성조차 안고 있으며 실현 불가능성에 의한 위기를 촉발시키는 막대한 양의 유동성을 발생시키는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우리는 신용의 유지에 있어 더욱 강력해진 정치적 명령을 목격하고 있다. 생산의 사적 성격과 생산의 사회적 성격 사이의 위기는 전지구적 과두정에 의해 봉합되어 있을 뿐이다. 또한 생산 자본은 신용에 의거하여 사회적이지만 이윤은 자본 이자의 형태로 사유물로 변하게 되며, 소수 금융자본이 중소 자본가들의 생산을 신용에 의거해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다1).

카르텔은 이윤율 저하경향을 막기 위한 자본들 사이의 연합인데, 이것은 중소기업과 같은 창의적 집단에 의한 새로운 시장의 개척보다는 기존 시장의 일부분에 역량을 집중하여 그 일부분의 이윤율만을 증가시키려는 경향을 띈 조직이다. 이것은 이윤율 저하경향에 의하여 반드시 해체되게 되어있다. 무엇을 더 말해야 할까? 커뮤니케이션 조직의 완벽화가 가져오는 정보의 편재성으로도 절대로 이러한 불변의 경향을 넘어설 수 없다. 이는 오히려 불균등축적을 불가능하게 만들어 이윤율 저하경향을 가속화할 뿐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자본주의의 번영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은 오직 두 가지다. 자본주의가 팽창할 수 있는 세계는 아직 넓다는 점. 이는 다음의 이유와 결합되어 현재에도 유효한 것 같다. 이른바 ‘중소기업의 불굴의 저항(SR 35)’도 그 이유가운데 하나이리라. 그러나 두 번째 이유는 저항이라기보다는 자본주의의 본질적 동력으로 보인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심화와 더불어 중소기업이 차지하는 통계적 비중은 본질적으로 하강하게 되어있으며, 따라서 중소기업이 점점 사라지는 것은 결국 자본주의 발전의 중단을 의미할 뿐이다2).


*개혁

노동조합, 사회 개혁을 통한 사회적 기업의 도입, 국가의 민주화가 바로 우리의 사민주의자들이 사회개혁을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으로 내세우는 것들이다.

노조의 핵심적 기능은 ‘특정 지점의 시장가격에 따른 노동력의 판매를 실현시키는 수단(SR 38)’이다. 그러나 노조는 생산에 의한 노동력의 수요와 프롤레타리아트화·사회적 재생산에 의해 이뤄지는 노동력의 공급의 양, 그리고 노동생산성3)에 개입할 수 없다. 노조는 착취율의 한계를 정할 능력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다. 노조가 개입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조정 가능하다고 사민주의자들이 이야기하는 생산의 요소에는 오직 생산기술의 결정과 생산규모의 결정 이외에는 없는데, 기술 결정의 경우 임금법칙을 폐지하지 않는 한 개별 노동조합은 노동의 가치를 보장받기 위하여 제2, 제3의 러다이트운동을 벌일 수밖엔 없다4). 생산량의 조절과 그에 따른 제품의 시장가격에 연동되는 임금 역시 매우 반동적인 노동자와 기업의 카르텔을 조직할 뿐이다. 결국 ‘생산과정에 대한 영향력은 차단되어있다.(SR 41)’

베른슈타인은 공장법을 사회주의의 일부로 간주한다. 노동자 계급은 “상승하는” 계급이다. 독일 국가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사회주의로 인도한다!(이상 SR 42) 베른슈타인의 동료인 슈미트는 심지어 이런 허무맹랑한 전제까지 이야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소유권을 다음의 두 가지로 구분하는 것을 구상한다. 하나는 그가 사회에 부여하는 것으로 좀 더 확대되기를 바라는 상급 소유권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가의 손에 있는 것으로 점점 더 단순한 관리로 축소되어가는 사용 권한이다.” 로자는 곧바로 공격한다. “이러한 구상은 더 이상 전달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순진한 말장난이다(이상 SR 43).” 슈미트의 태도는 일종의 원시주의적 태도라는 것이다. 생산을 둘러싼 사회적 힘관계를 말해주는 것이 바로 소유권이다. 다양한 사회적 힘관계가 존재할 때는 소유권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분할되고 무엇보다도 서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었으나5) 생산의 일반적 형태가 상품과 겹쳐있으며 이윤의 유지를 그 근본 공리로 하는 자본주의사회에서 소유권은 회계기술에 의해 뚜렷하게 구별 가능한 이윤부분에 대하여 행사되는 것으로 정확히 정립되었다. 이윤부분이라는 순수 소유가 발생한 것이다. 슈미트의 주장은 순수 소유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며 따라서 사회적(public)소유와 자본가의 관리라는 표현은 완벽한 넌센스다. 어쨌든 순수 소유를 공격하는 주권적 권능은 순수 소유인 이윤의 존재가 가능한 한 그것의 소유자가 되기를 원하는 부르주아 및 소부르주아에 의하여 반드시 공격받을 수밖에는 없다. 노동조합의 권리와 주식회사에 대한 국가의 관리 등을 포함하는 베른슈타인이 말하는 이른바 ‘사회적 통제(SR 45)’는 이 착취 질서를 규범화하는 것이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로자가 베른슈타인을 완벽히 개발살내는 장면을 구경해보자. “베른슈타인이 공장법에 많든 적든 사회주의적 요소가 존재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최선의 공장법에는 거리 청소나 가로등 점등 ― 이것 역시 ‘사회적 통제’가 아닌가 ― 에 사회주의가 스며있는 것과 똑같은 정도로 사회주의가 스며들어있다고 그를 확신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SR 46)."

군국주의라는 병리현상은 오늘날 상당부분 그 양상이 변화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므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군국주의와 관세를 전지구적 자본 실현에 있어 병리현상으로 본 로자의 식견은 이제 전적으로 옳은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발언들을 간단히 인용하는 것으로 군국주의에 대해서는 논의를 멈추겠다. “관세는 … 산업의 카르텔화를 위한 … 수단으로 필요할 뿐이다(SR 48).” “오늘날[19세기 말]… 서로 적대하며 등장한 세력들은 … 바로 동등하게 높은 수준의 자본주의가 발전했기 때문에 갈등하게 된 나라들인 것이다(SR 50)." 오늘날 지구상에는 이러한 경향을 지닌 독자적인 광역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의회주의에 대해서는 2부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더 많다. 사회화와 사유와 사이의 대립에서 우리는 국가의 통제와 사회화가 동시에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만 지적해 두면 로자의 도식을 현재에도 유용하게 써먹을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알고 있다. 그리고 이 문장에도 어떤식으로든지 명확하게 누구나 동의할 수 있다는데 우리는 모두 동의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정치적 법적 관계는 자본주의 사회와 사회주의 사회 사이에 더욱 높은 벽을 세운댜. 이 벽은 사회 개량이 진전됨으로써도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전을 통해서도 약화될 수 없으며 반대로 더욱 강화되고 더욱 높아질 뿐이다. 따라서 이 벽을 무너뜨리는 길은 오로지 혁명의 망치질, 즉 프롤레타리아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길 뿐이다(SR 53).”


*결과: 사민주의와 그 좌초 지점


우리는 아직 19세기 말을 지나고 있으므로 동일성의 평면의 이행 과정에 따라 변화하는 근본적 대립의 존재를 목격할 수 있는 지성사의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니체는 당시 잊혀져가고 있었고 더군다나 당시의 맑스주의자들이 그를 적극적으로 응용한 경우도 없었다. 맑스와 니체의 최초의 결합은 들뢰즈에 의하여 시도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신좌파의 탄생 이전의 맑스주의자들은 그와 같은 계보학적인 작업을 할 줄 몰랐던 것 같다. 게다가 이 논문은 당시 갓 50년을 넘긴 맑스주의 내부 논쟁의 날카로운 한 단편이다. 하지만 맑스주의 내부에서 찾을 수 있는 가장 강한 강도를 가진 대립 지점을 우리는 이 논문이 명백히 가리키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급진주의자들과 사민주의자들의 대립말이다. “노동조합, 사회 개혁과 정치제도의 민주화를 위한 투쟁 ― 이것이 사민당의 활동 내용이다. 차이는 무엇Was이 아니라 어떻게Wie에 있다(SR 54)."

사회주의로 향하는 초보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을 뿐인 노조 투쟁과 정치투쟁이 가지는 의미는 노동자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화하는데 그 궁극적 목적이 있다. 최종 목표를 삭제한 투쟁이 '취하는 노선은 여러 갈래로 갈라질‘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 노선들은 당연히 직접적 실제결과로 수렴될 것이다. 도대체 자본주의 상황 속에 안주하는 이들에게 사회 개혁이라는 것이 공허한 구호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따라서 “사회주의는 결코 노동자계급의 일상 투쟁 속에 내재하지 않는다. … 더욱 첨예화되는 자본주의경제의 객관적 모순과 사회변혁을 통한 자본주의 경제의 철폐라는 절대 포기될 수 없는 목표라는 노동자 계급의 주관적 인식에 내재할 뿐이다(이상 SR 57).” 게다가 그의 전술은 모순의 완화에 의존한다. 신용과 카르텔의 생산과 교환관계의 모순 완화, 프롤레타리아트의 상태 개선과 쁘띠부르주아의 강화를 통한 자본과 노동 모순의 완화, 통제와 민주주의를 통한 계급국가와 사회 간의 모순 완화(SR 58~59). 이러한 모순은 명백히 자본주의의 발전에 의한 것이므로 자본주의의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전술은 본질적으로 완전히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사민주의의 배패에 대한 예언적 언급으로 인식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언급은 사민주의의 소부르주아성을 통렬하게 지적하고 있다. “개별 자본가에게 위기란 실질적으로 단순한 교란이며, 위기의 종식은 그에게 좀 더 긴 생존기간을 부여한다. 마찬가지로 신용은 개별 자본가에게 자신의 불충분한 생산력을 시장의 요구에 적응시키는 수단이다. 또한 개별 자본가에게 자신이 가입한 카르텔은 생산의 무정부성을 실제로 제거하는 것처럼 보인다(SR 63).” 이처럼 모순 또는 아포리아의 조건에 대해 철저히 천착하지 않고 그것을 부당하게 회피하려는 이들에게 가장 어울리는 독일어 형용사는 '속류적인vulgär'만한 것이 없고, 그에 따라서 이런 소부르주아의 경제학에 쓰라고 맑스는 통쾌하기 짝이 없는 조어인 속류경제학Vulgärökonomie을 만들었나보다. 오늘날 사민주의의 패배는 분명 이러한 속류적 경향 때문이다.

 

 

 

미주

  

1) 룩셈부르크가 지적한 생산양식과 수취양식간의 모순, 소유관계와 생산관계의 모순(SR 28)은 신용 자체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주식회사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 주식회사는 신용과 카르텔이라는 형식이 혼합된 것을 의미한다.

 

2)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번영하는 이유는 우선적으로 두 번째 이유에 따른 것이리라. 즉 포섭은 형식적이지 않고 실질적이다(E 360). 그리고 『제국』의 저자들에 따르면 이러한 포습을 가능하게 하는 영역의 발생은 근본적으로 ‘자생적이고 초보적인 코뮤니즘을 위한 잠재력(E 387)’에 의해 가능한 것이다. 이러한 노동을 저자들은 비물질적 노동이라고 부르며, 이것들은 산업 생산에 대한 피드백 작용을 의미하는 토요타주의에서부터 컴퓨터의 조작과 흡사한 상징을 다루는 노동을 거쳐 인간의 정서에 대한 노동인 정서적 노동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주를 포괄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산업의 일반적 형태다(E 381~387). 네그리&하트는 이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는 잠재력을 공통적인 것(the Commons)으로 개념화하려는 시도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잠재력은 공공의 것과 사적인 것이라는 대립적인  쌍의 존재를 넘어서는 힘이며 동시에 공통성(common)과 단일성(singularity)의 근거이기도 하다. 사적인 것을 억누르고 등장하는 공동체인 res-publica에서 공통성과 단일성 모두를 원리적으로 포함하게 되는 res-communis로의 이행이 the Commons가 입헌적 힘을 가지게 될 때 발생하게 될 것이다(M 202~208). 따라서 저자들에게 오늘날의 아포리아는 대립쌍들의 반영구적 대치와 위기보다는 공통적인 것이 부패하는 것에서 유래한다. 부패는 공통적인 것이 무한히 미끄러짐을 의미하며 따라서 무한한 혁신을 우리에게 요구한다(E 270~271). 절대적 민주주의 또는 혁명의 시간이 도래해야만 한다. 이것에 대한 사유화가 자본주의이고 이 사유화를 통하여 자본주의는 ‘실질적 포섭’을 지속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오늘날의 자본주의가 지속적으로 성장하는데 대한 네그리&하트의 답이자 나의 잠정적인 답이다. 명백히 로자의 시사성은 사회주의 고유의 토포스를 지적하고 그 곳 다중의 성격을 이야기하려는 점이다. 그녀는 독수리의 위대성을 여전히 가지고 있지만 이미 닭들이 뛰노는 높이로 날아오기에는 너무 높은 곳에 있는 것 같다. 물론 이는 힘의 변동이 가져오는 어쩔 수 없는 융기 현상 때문이리라.

 

3) 생산성에는 기술수준을 조정하면서 개입하는 것이 가능하긴 하다.

 

4) 즉 파업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위기를 실현하는 방식의 일종이었던 것이다.

   

5) 소작농과 지주 사이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중국 제국에서는 토지의 원칙적 소유자가 황제였으므로 더욱 다양한 관계가 나타나게 된다. 황제가 지주에게 땅을 하사한다(실제 관료들이나 제후들의 토지소유권의 기원은 황제다). 원칙적으로 지주는 10%가량의 토지세를 국가에 바친다. 그리고 지주는 소작농에게 토지의 소작권을 준다. 그리고 수확량의 50%가량을 소작료로 가져간다. 이 경우 원칙적인 수확물의 분배 비율은 국가에게 10%, 지주에게 40%, 소작인에게 50%정도다. 그러나 각종 잡세가 국가에 의해 부과되는 것이 매우 일반적이었고 소작세가 7할에 달하는 경우도 있는 등 이러한 단순한 관계와 비율을 중국 제국에서는 오히려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핵심적인 것은 이러한 분배비율이 일종의 정치적 힘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점이다. 회계를 통하여 이윤부분이 다른 지출부분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다뤄질 수 있게 범주화된 경우와 명백히 대조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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