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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리스펙토르의 시간
  • 엘렌 식수
  • 16,200원 (10%900)
  • 2025-04-30
  • : 2,211


느른한 혼침에서 흔들어 깨우는 음성과 향기. 내면의 가장 어둡고 외진 바닥에 무겁게 침전되어 있던 존재의 입자들이 누군가의 향기로운 입김에 동요하며 먼지처럼 가벼이, 사방으로 부유하며 떠오른다. 그 입김은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날숨이며, 엘렌 식수의 들숨이다. 달큼한 그 숨결에 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사방으로 흩어져 은빛으로 날아오른다. 이 텍스트는 시인가. 주문인가. 기도인가. 응답인가. 아니면, 오렌지의 황금빛 노래? 시초에서 들여오는 누군가의 부름? 천둥? 모든 것인가, 그 어떤 것도 아닌가.


오래된 동굴 속 벽화를 만지듯, 클라리스 리스펙토르의 단어들을 더듬다보면, 내가 읽힌다는 숨죽인 기쁨에 가슴이 죄어든다. 은총이란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늘 거기에 머무르기에 가장 익숙하지만 가장 외진 장소. 그곳에 도달하는 한 줄기 빛, 발견됨의 안도감, 기이한 공포감. 탐독되기를 바래온 묵은 페이지, 독해를 기다려온 뭉개진 비문. 비석의 축축한 이끼에 닿는 따스한 손길. 섬광 같은 구원. 하지만 이내, 궁극의 무명으로 되돌려놓는 섬뜩한 지혜, 자애로운 배려, 최후의 은총. 내가 너무도 간절하게 원하고 원하는 그것.


“나에게는 말하고 싶지 않은 여자들이 있다.” (9p)


엘렌 식수는 이 책을 여는 글, <오렌지 살기>를 이 한 문장으로 연다. 망설임과 유보의 유혹, 그럼에도 말해야 한다는 당위가 문장을 압박한다. 나는 단번에 알아차린다. 내가 들은 목소리를 원형으로 간직하고 싶은 조바심, 그 목소리와 함께 달아나야한다는 절박함. 언어가 그 목소리를 얼어붙게 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 세계를 직관으로 알아채는 커다란 귀이자 “고통을 끊임없이 기쁨으로 맞바꾸는” 선한 목소리. 이 책은 그 목소리에 대한 사랑으로 출렁인다. 그 목소리는 클라리시 리스펙토르이다.


“그것은 단순한 글쓰기 이상이었고, 위대한 글쓰기, 먼 과거의 글쓰기, 대지와 식물의 글쓰기였다.” (13p)


혀가 전부 죄어든 시대에 글쓰기의 자기 심판에 절망하던, “눈물 한 방울이 된 영혼”, 엘렌 식수다. 그에게 반짝이는 손이 다가온다. 그 손은 식수를 찾아내 열망과 믿음과 음악을 되돌려 준다. 그것은 놓아주고, 보살피고, 구원하는 손이다. “무한히 섬세한 손길”은 존재에 빛을 비추고, 신비를 보호했다. 생명을 감싸고 흙을 어루만졌다. 우리의 영혼을 만나러 “손으로 변모한 목소리”, 약속과 기도로 번역된 목소리. 리스펙토르의 목소리가 식수를 울린다.


“오렌지는 하나의 순간이다. 오렌지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17p)


리스펙토르는 “오렌지를 구해야 해”라고 식수의 귓가에 속삭인다. 말라가던 식수의 심장이 오렌지의 힘으로 솟구친다. “현전하는 빛의 구”, “초록빛 밤으로부터 내려온 붉은 낮”, 오렌지. 태양과 대기와 대지로부터 잉태된 오렌지. “모든 오렌지는 기원적이다.” 무한한 시간을 응축한 오롯한 한 순간인 오렌지. “근심 없이, 두려움 없이” 시간의 과즙을 탐하여, 오직 생명의 기쁨으로 찬란한 과육을 길러내는 오렌지. 순간이자 영겁인 오렌지. 리스펙토르의 “기원을 향한 사랑”이 식수를 가늠조차 어려운 시간으로 데려간다. 오렌지의, 오렌지를 위한, 오렌지로 사는 것. 시간은 그렇게 과거와 미래로, 현재로 순환하며 황금빛 알갱이로 영글어간다.


“그것은 누구도 되지 않는 것, 마치 장미처럼, 모든 이름을 앞선 순수한 기쁨이 되는 것이다.” (30p)


리스펙토르는 이름들을 벗어던진다. 그가 무한히 변신하며 관통해온 시간의 터널 속에서 호명되었던 무한한 이름들. “벗어던짐의 규모는 무한힌 뻗어간다.” 왜냐하면 이름 속에서 그녀는 질식해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자아의 막을 벗어던지고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것은 나라고 불리는 그것이, 본래 세계와 하나였음을 지각하는 것이다. 세계의 맥박, 그 혈류와 한 몸임을 자각하는 것. 그렇게 껍질을 벗어던진 리스펙토르가 당도한 장소는 “원초적이고 온전한 우리, 번역 이전의 살아있는 우리”로 차오른다. “죄의식의 신분증”없이 현존할 수 있는 이 공간은 “숭고한 야생성”으로 충만하다. 이 장소로의 여행은 오렌지, 오직 오렌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오렌지는 장미이며, 동시에 바퀴벌레이다. 리스펙토르이며 식수이며, 나이다.


"그녀는 나를 읽었다, (중략) 나는 그녀가 나를 읽게 했다. 그녀는 내 안에서 자신을 읽었다.” (34p)


이 문장을 읽고 놀라 안으로 탄성을 삼켰다. 클라리스 리스펙토르를 읽으며 늘 해온 생각, 이 문장으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는 어떤 것. 이해, 공감, 교감 같은 언어로는 턱 없이 부족한 것. 이 책을 처음 펼치는 순간에도 이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나를 읽어. 세상은 참 신기해. 식수가 썼듯 “어떤 여자들은 경계심 없이 창문을 열어두는 힘을 지녔다” 그 창문으로 뜻밖의 은총이 찾아든다. 어떤 저자와 독자는 서로를 알기도 전에, 영원히 만나지 못해도, 서로를 읽는다. 서로를 쓴다. 세상은 참 신기한 곳이다.


“별과 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먼가, 얼마나 믿을 수 없을 만큼 가까운가.” (148p)


식수가 더없이 느리게 노 젓는 배에 올라 <리스펙토르의 시간>을 나아간다. 희부연 은하수 안에 별의 항로를 떠간다. 영영 길을 잃기 위해 나아간다. 그러나 언제나, 영영 돌아온다. 그 길을 따라 광대하고 둥근 존재의 불빛이 환하게 밝혀진다. 별의 시간이 내 안으로 흘러들어온다. 나라 불리는 그것이 별의 시간 안으로 쏟아져 흘러나간다. 나는 무궁한 자유 속에 헤엄친다. <리스펙토르의 시간>, 그러니까 <별의 시간>은 마카베아의 시간이며, 리스펙토르와 식수, 그리고 나의 시간이다. 가난하고 부유한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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