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프와 함께 제인 오스틴을 읽는다는 것
- 제인 오스틴,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
한 작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일일까. 우선, 그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는다,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작가를 묻는다면 그를 제외한 나머지 작가를 얘기한다, (그것은 조금은 비밀 연애 같은 것이다.) 그 작가와 자주, 어디든 동행한다. 어떤 장면이나 사건 앞에서 그 작가와 침묵의 대화를 나누곤 한다. 이럴 때 작가와 독자의 관계는 내밀한 어떤 것이다. 사실 그 작가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렵다. 소중한 감정이 잘못 전달되어 훼손되는 느낌을 피하고 싶고, 무엇보다 짧게 전달할 수 없는 깊은 내면과 연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별의 거주민이다.
그 은밀한 연인이 또 다른 작가에 대해 “여성 작가 중 가장 완벽한 예술가”, “작품으로 영원히 살아남을 작가”라는 찬사가 담긴 정성어린 에세이를 남겼다면? 그 에세이를 읽는 것은 더 없이 충만한 데이트가 된다. 연인을 성장시킨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연인에 관한 이해의 조각을 하나 더 갖게 되니 흥분되는 일이다. 제인 오스틴에 관해 쓴 버지니아 울프의 비평을 읽으며, 버지니아 울프에 의해 쓰여 진 제인 오스틴을, 제인 오스틴을 쓰는 버지니아 울프를 동시에 대면한다. 별에 먼저 살고 있던 거주민이 있었던 것!
에세이 <제인 오스틴, 모두가 두려워하는 부지깽이>를 읽는 일은 버지니아 울프와 함께 제인 오스틴이라는 견고한 성으로 입장하는 일이다. 작은 목사관을 넘어 “우주라는 좌표” 속에 자리한 그 성은 요람에서부터 이미 선택해 놓은 문학의 왕국이었다. 울프는 제인 오스틴이 “그 영토를 다스릴 수 있다면 다른 것은 탐하지 않기로 요정에게 약속했다”고 쓴다.
울프에 의하면 제인 오스틴은 어린 나이에 이미 타인에 대한 환상은 물론이고 자신에 대한 환상은 더욱 없었다. 냉철한 관찰과 글쓰기는 감상이나 연민, 격정의 외풍을 일찍부터 차단했다. 스스로 쌓은 경계를 지킴으로써 자신의 문학적 왕국을 냉정하게 통치했고, 그 결과 “영속적 품격”을 지닌 문학의 성채를 완성해갔다.
“사람은 본래 그런 존재다. 열다섯 살 소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성숙한 여인이 된 저자는 그것을 증명해냈다.” (39) 서늘한 문장이다. 뜨거운 문장이다. 세상을 그저 말없이 바라볼 뿐인 침묵. 놀랍지 않은가. 제인 오스틴의 침묵은 정말 무섭다고 울프는 쓴다.
침묵이 낚아챈 인간에 대한 통찰. 제인 오스틴은 그것을 정교하게 조율된 “감정의 흐름과 구성의 균형”을 품은 이야기에 담았다. 그리고 “인내심 있게, 정확하게” 그것을 독자에게 들려준다. 제인 오스틴은 어떤 재료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본능적으로” 이해했다고 울프는 기록한다.
훌륭한 비평은 언제나 독자의 성마른 독서 습관을 돌아보게 한다. 문학을 읽는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샘솟는 궁금증으로 비평의 주인공이 구축한 문학 세계로 독자를 이끈다. 이러한 비평은 독자의 독법에 깊이 있는 안목을 심고, 독서 경험의 외연을 확장시킨다.
제인 오스틴에 관한 울프의 이 비평이 그렇다. 그런 만큼 버지니아 울프와 제인 오스틴의 애독자들에게 이 에세이는 각별하다. 두 작가의 숨결을 하나의 에세이에서 호흡할 수 있다니, 거기에 읽는 이의 숨결까지 더해지니, 시공을 넘어 두 대가가 연주하는 문학의 파동에 독자는 감동하고, 전율한다.
최근 국내 출판계에도 제인 오스틴 다시 읽기가 한참이다. 이 에세이야말로 제인 오스틴을 다시 펼치게 한다. 작가의 재능을 두고 울프는 “요람 옆에 있던 요정 하나가 갓 태어난 그녀를 데리고 세상을 한 바퀴 날아다녔음이 틀림없다.”고 쓴다. 그 소녀는 무엇을 보았을까. 나도 제인 오스틴이 세운 왕국의 상공을 다시 날고 싶다. 버지니아 울프의 손을 잡고 날아올라, 이 에세이의 페이지들을 깃털 삼아 더 높이 그리고 더 깊이, 문학이라는 창공을, 그 심연을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