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과 예술이 상호 침윤하여 발하는 오묘한 색채에 읽는 내내 탄복할 수 밖에.
작가 본인이 인정하듯 안정되고 완벽했던 유년 시절과 그 이후 길게 이어지는 상실의 지난한 시간들. 삶의 양 극단을 횡단한 작가의 글에서 회한이 느껴지지 않는다. 기이한 명암을 통과한 이가 도달하게 된 어떤 종류의 경지 혹은 여유가 드러내는 절제, 품위, 재치.
풍요로운 자연과 예술과 지성이 성벽처럼 둘러싸인 세계. 3층의 저택과 시골 영지들, 20세기 초 50여명의 하인, 성장 단계마다 계급과 인종을 달리해서 배정된 가정교사들, 해외 연휴들. 배급을 받으려 줄 선 여자들을 보며 부부가 나눈 대화. 이 묘사들이 안겨주는 생경함과 복잡함.
기억의 천재, 기억의 예술가가 뽑아내는 은사같이 빛나고 섬세한 문장으로 엮은 지복과 비극.
읽는 내내 제발트가 떠오르는 건 당연한 일. 유년과 기억, 상실과 망자들, 이산과 여행, 역사와 개인.
장소와 시간들.
그리고 빛바랜 사진들.
그리고 나비, 나비, 나비.
나보코프 독자들만이 아니라
제발디언들도 반길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