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작가를 이해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글이 있다. 슬며시 그 작가의 마음 안으로 끌어당겨 주는 글. 그가 세계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전망과 온기, 깊이와 조도, 그 바탕을 가늠하게 해주는 글. 윌리엄 해즐릿의 에세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속 에세이들이 그렇다. 특히 후반부에 나란히 실린 두 에세이를 통해 나는 해즐릿의 글을, 이 작가를, 이 사람을 만난 것 같았다. 그 사람 해즐릿.
국내에 먼저 소개된 해즐릿의 두 권의 에세이집을 차례로 읽고 작가의 혜안과 필력에 놀라움을 느꼈다. 찌르는 듯한 통찰, 세공한 듯한 표현. 본질을 파고드는 타협 없는 사고와 더 없이 세밀하고 정밀한 문장은 후련함을 주었다. 앞선 에세이집들과 비교해 이번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는 인간과 인생에 대한 해즐릿의 좀 더 내밀한 사유를 엿 볼 수 있어서 각별하다.
청춘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청춘은 영원의 예감 속에 살며, 이 예감이야말로 그들을 살아 있게 하는 불꽃이기 때문이다.” 영원의 예감, 얼마나 정확한 표현인가. 청춘, 푸른 봄은 가을과 겨울을 모른다. 아니, 몰라야한다. “청춘은 삶이라는 잔을 갈증 난 듯이 들이키지만 그 잔은 바닥나지 않는다. 기쁨과 희망이 늘 넘쳐흐르고 세상의 온갖 사물을 향한 욕망이 청춘의 마음을 가득 채운다.” 아, 찬란하다. 결핍과 낙담에 침잠해 있어도 세상을 향한 호기심과 열정의 창은 늘 열려 있던 시절, 고통조차도 흘러넘치던 시간. 과연 그렇지 않은가.
해즐릿은 청춘의 환희를 이렇게도 표현한다. “시간과 자연이 우리 발아래 모든 보물을 쏟아 붓는 듯한 감각 속에서 우리는 존재하고 행동하며 세상을 향해 문을 연다.” 불행 중에도 온 몸을 순환하는 혈관에 청신하고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감각, 작가는 그 미묘한 느낌을 놓치지 않는다. 해즐릿의 이 싱그러운 청춘 예찬이 뒤이어 몰려올 삭풍의 엄혹함을 대비시킬 청춘 만가(輓歌)임을 예상하면서도 나는 그의 문장에 노곤히 빠져든다. 간지럽고 달짝지근하고, 호방한 기운에 잠시 부푼다. 향긋한 봄바람이 스친다.
만년(晩年)을 묘사하는 해즐릿의 문장은 옳다. “인생의 축제 행렬이 거의 다 지나갔을 때, 가면극이 우리를 배신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인생과 시간의 기만을 간파하고 그 행렬에 끝이 있음을 믿게 된다.” 작가는 프랑스 혁명이 미완으로 저물었을 때 더 이상 젊다고 느낄 수 없었다고 적었다. 청춘의 끝은 나이 듦과 신체의 노화와 늘 같이 가지는 않는다. 청춘의 피날레는 마음에서 먼저 울려 퍼진다. 나의 프랑스 혁명은 언제였나. 나는 언제 더 이상 스스로 젊지 않다고 생각했을까. 그 자각은 불현 듯 찾아온다. 그리고 떠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자각은 나쁘지 않고, 그 자각과 함께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삭풍은 정신을 맑게 한다.
“모든 것이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탐욕과 부패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다” 세계에 대한 충만한 감각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해체된 무대 위의 황량함과 가면이 벗겨진 얼굴의 옹색함을 직시하는 서늘한 감각이다. 인간과 삶의 실상에 대한 앎은 청춘을 내어준 대가다. 환영이 사라진 자리에 작은 진실의 조각들이 먼지처럼 엉켜 뒹군다. 심상하기 이를 데 없는 그 진실의 보풀들을 알아보고, 겸허하게 품을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삶의 축복이 아닐까. 해즐릿이 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항상 타오를 “존재의 흔적”은 소박하지만 숭고한 이 지혜가 아닐까 싶다.
“품위 있게 삶을 마무리 할 수 있다면, 큰 병을 치르지 않고 마음마저 고요하고 단정한 정물화처럼 정돈된 상태에서 무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전부일 것이다.” 내가 원하는 전부를 해즐릿은 이렇게 “단정한 정물화”처럼 써놓았다. 하지만 그런 정물화는 현실에 거의 불가능하다는 걸 해즐릿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문장이 더 쓸쓸하게, 진실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결국 사소한 상황에 휘둘리는 존대다. (중략) 우리는 사소하고 성가신 현실의 희생양이 된다. 인간의 정신은 숭고하게 부풀 수 있지만, 동시에 비굴과 혐오와 편협함에 익숙하다.” 이래서 해즐릿이 좋다. 그는 인간과 인생에 환상을 품지 않는다. 냉정하다. 우리는 나날이 우리 자신으로부터 찢겨 나가고, 죽음은 남은 마지막 조각을 무덤으로 데려갈 뿐이라고 해즐릿은 쓴다. 그럼에도 “우리의 욕망과 기대는” 언제나 과도하다고 작가는 꼬집는다. 그래서 비굴해지고 편협해진다는 것이다. 삶의 진상이 여실해진 후에도 여전한 욕망은 얼마나 처치 곤란인가.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에 대하여” 제목부터 노화를 금기시하고 죽음을 외면하는 현재의 문화를 향해 날리는 날 선 냉소와 같다. 죽는 그 순간까지 청춘이기를 강요하는 자본과 미디어의 확성기들, 그 강요를 기꺼이 경쟁하며 수행하는 개인들이 만든,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기대하는 거대한 방부제 덩어리로 변해가는 세계를 떠받드는 망상. 그 망념의 뿌리가 바로 이 영원히 살 것 같은 느낌이 아닌가.
메멘토 모리(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이 금언을 새긴다면, 삶의 많은 것들이 단출해질 것이다. 결핍감과 자기기만, 광대짓과 헛발질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 해즐릿의 표현대로 언젠가 “존재가 비존재로 전환된다는 사실”을 직시하는 것은 내가 채웠던 수많은 족쇄를 여는 열쇠가 될 수도 있다. 영생에 대한 착오와 착각이 일으킨 무수한 사고와 수행의 오작동들이 우선 진정되기 시작할 것이다.
“사람들이 낙엽처럼 떨어지고 시간의 낫에 풀처럼 베어 나간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역설적으로 청춘을 되돌리는 방편일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감한다.” 삶의 유한성을 절감할 때야말로 시간의 농도는 짙어지고, 순간이 밀도 높게 경험되지 않던가. 과거와 미래의 시간을 녹여내 “단 하나의 강렬한 공감의 순간으로 응축”시키는 마법의 시간장. 그 안으로 진입하는 만년의 입춘.
이렇게 두 번째 청춘은 이전과는 다르다. 이 청춘은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이제는 안다. “이 삶이 언젠가 끝날 수 있다”는 진실을 안다. “존재의 허무”를 수신한 후의 청춘이다. 이 청춘은 처음처럼 다시 삶을 경험한다. 하지만 더욱 강렬하게 체감한다. “삶은 참으로 기묘한 선물이며, 그에 따르는 특권은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새로운 봄을 맞이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그 모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즐릿은 이 에세이로 말을 건다.
해즐릿은 무상함이 안겨주는 찬란함을 독자에게 일깨우고 이른 낙엽처럼 표표히 떨어져 세상을 떠났다. 갈바람에 가벼이 나부끼며 비상하는 고엽들. 그 사이로 설핏 비치는 삶의 기묘함과 신비함. 그걸 보았냐고, 이 가을 해즐릿이 묻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