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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
  • 로베르트 발저
  • 15,300원 (10%850)
  • 2025-07-18
  • : 861

“나는 형언할 수 없이 즐거운 영혼과 함께 아름답고 경건한 어둠 속을 계속 걸어갔다.” 이 책 속 산문 <풍경1>의 마지막 문장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받은 인상을 요약한 문장 같다. 이 인상은 내가 발저에게 늘 매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발저는 계속 걷는 사람이다. 그가 늘 변함없이 산책하는 곳은 그가 거주하는 곳의 숲과 들판, 산과 호수, 강가와 마을이다. 이 장소들은 그의 눈길과 발길이 구석구석 반복해서 닿아 선명하게 빛난다. 따라서 이곳들은 세상 그 어떤 특별한 곳보다 각별한 장소가 된다.


그는 어둠 속을 걷는다. 그가 아무리 찬란한 봄날의 환한 햇살 속을 걸을지라도 그의 속눈썹 아래는 그늘졌다. 눈은 어둠을 보았으며, 마음에는 어둠의 입자들이 떠다닌다. 발저는 장소를 지배하는 “무한한 슬픔”을 본다. 이때 그의 심장과 상상력은 “안개와 잿빛”에 활짝 열린다. 그는 어둠을 안다.


그러나 그의 어둠은 아름답고 경건하다. 그 어둠은 씻기고 씻겨져 말개진 어둠이다. 나는 발저의 글들을 읽을 때마다 한참을 눈물 흘린 사람의 말간 시선을 느낀다. 한차례 비를 쏟아 부어 퀭해진 대기 위로 뿌려지는 햇살 같은 맑음. 어떤 시간들을 비워내고 덜어낸 사람만이 볼 수 있는 경건한 광휘. 발저의 어둠은 찬연하다.


발저는 그 어둠을 형언할 수 없이 즐거운 영혼과 함께 걷는다. 자기 정화를 통과한 혹은 통과중인 사람의 홀가분함. 이 홀가분함이 그의 문장을 날아오를 듯 가볍게 만든다. 어둠을 아는 발저는 빛의 채도에 민감하다. 그는 자신을 “둘러싼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걸음을 멈추고 사위를 주의 깊게” 둘러볼 줄 아는 마음의 폭과 깊이를 가졌다. 사물의 경이를 시시각각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영혼만큼 즐거운 영혼이 있을까. 그 즐거운 영혼은 발저 자신이다. 그는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잃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그 자신과 동행한다.


이 책에 포함된 한 에세이에서 발저는 호수 수면에 비친 숲을 바라보는 청년의 입을 빌려 말한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 돼. 지금도 우리는 흘러가고 있어. 우리 가슴 속에 더는 정지된 것은 없어. 이제 우리는 갑자기 사랑하게 돼. 그건 모든 것을 안에서부터 뒤집어엎어 무너뜨린 다음 다시 새롭게 쌓아 올리는 사랑이야”


자신을 포함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은 흘러간다. “저기 숲이 있어. 아름답고 또 아름답게 누워 있어. 그렇게 숲은 죽어가. 안녕. 잘 자!” 청년은 이렇게 호수에 드리운 거대한 숲과 구름을 향해 인사한다. 세계의 아름다움은 이렇게 “작디작은 것”들의 덧없음으로 이루어졌음을 발저는 소박한 문장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놀란다. 문장이 묘사하는 풍경의 아름다움과 그 풍경에서 낚아챈 발저의 직관에 놀란다. 이것들을 표현하는 문장의 간결함에 전율한다.


발저의 글들은 매번 이런 방식으로 나를 전율시킨다. <전나무, 손수건, 그리고 작은 모자가 있는 숲>에 포함된 에세이들은 발저에게 성큼 더 가까이 데려간다. 이 산문집은 그가 산책을 통해 그를 둘러싼 자연 세계를 주의 깊게 바라본 섬세한 인상들로 가득하다. 그가 자연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고 인식했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다. 발저의 오랜 독자라면 특히 만족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초록을 알지 못한다. 이해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초록은 무섭고, 섬뜩하고, 압도적이다.” <초록>이란 타이틀을 가진 산문의 일부분이다. 나는 여러 이유로 여름을 어려워하는데 바로 이 맹렬함 때문이다. 맹렬하고 아우성치고 살기등등한 한 여름의 초록. 지금 내 앞 창문 전체를 꽉 채우고 있는 바로 이 계절의 저 초록. 발저의 <초록>은 이 산문집의 백미이다.


“사랑 같은 무언가가 숲을 가로질러 희미하게 빛난다.” 숲에 살고 분명히 느껴지는 무언가. 어린 새들의 합창을 지휘하는 무언가. 이 무언가는 “숲에 사는 침묵의 존재들”이며 “새들의 세계와 우정을 맺는 존재들”이다. 발저는 이것을 그저 “사랑 같은 무언가”라고 부른다. 나는 이래서 발저가 좋다. 이 책을 읽은 나는 그것들을 숲의 영혼들이라고 가만히 불러본다.


“거봐! 고통은 행복이야. 난 숲에서 그걸 배웠어. 이 사랑스럽고, 또 사랑스러운 숲에서!” 고통은 행복이야. 고통은 행복이야. 반복해서 읽어본다. 눈물이 나오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세월 숲을 걸어야 했을까. 걸어야 할까. “상처받기 쉬운 인간은” “그저 꿈같이, 부드러운 숨결같이 잠시 피었다 사라질 뿐이다.” 숲 속의 <하이덴슈타인>이라는 바위를 보며 발저는 이렇게 생각한다. 숲으로 걸어 들어간 발저는 자기 내면을 깊숙이 걸어 돌아 다시 숲으로 걸어 나온다. “당당하고 자유로운 것은 모두 고통을 겪는다.” 따라서 숲은 “고통 속에서도 침착함과 당당함을 유지하는 법을 아는 것처럼 보인다.”


숲은 “자기들 방식으로 시이고 이야기인 미소 짓는 침묵의 형체들”로 분주하고 수다스럽고, 때로는 고요하고 평온하다. 감각을 과감히 열어젖혀야만 숲의 노래를 들을 수 있다고 발저는 말한다. 숲 속에서 발저의 사유는 오감을 열고 “이리저리 헤매는 나비처럼 아름다운 것 주변을 날아다닌다.” 그 나비가 무수한 날개를 접고 살포시 내 책상 위에 앉는다. 나는 책날개를 열어 그 나비가 채취한 생의 찬란함과 적막함을 혀끝으로 맛본다. 진한 숲 향기가 전해진다. 차갑고 향긋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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