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통령 대선 전후를 이 책과 함께 보냈다. 내란세력은 여전히 준동했고, 몇몇 대선 후보들은 최소한의 품위마저 장착하지 않고 정치와 시민을 모욕했다. 쏟아지는 기사와 논평들을 접하며 분노와 우려를 왕복한다. 회오리치는 감정에 휩쓸려 나 또한 사안들을 성급하게 판단하기 바쁘다. 사유는 없고, 날것의 감정만 출렁인다. 들끓고, 내뱉고. 기사 속 인물들과 나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러다 자기 전에 이 책을 펼치면, 신기하게도 내게 필요한 문장이 있었다. 사적인 울림을 주는 문장부터 정치 이슈로 복잡해진 마음을 정돈시켜주는 문장까지. 내가 잊거나 놓친, 해보지 못한 사유가 책 속에 있었다. 오래되고 내밀한 주된 관심사로 걸어 들어오는 저자들(이런 순간은 정말 감동이다), 궁금했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난감했던 분야의 실마리를 제공해준 책들, 환한 통찰로 이끈 문장들, 막연히 안다고 여겼던 것들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일깨워준 페이지들.
언론인 고명섭 선생은 책속에 76권의 책을 담았다. 그가 읽고, 다시 쓴 책들은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철학, 과학, 미학, 사회학, 역사학, 시학, 신화학 등 전문서이다. 해당분야의 비전공자는 섣불리 손을 뻗어 펼치기 어려운 주제이고 책인데, 너무 흥미로워 줄어드는 페이지가 아쉽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읽는 내내 탄복했다. 읽어들 보시면, 이유를 알게 될 것이다. 저자는 책이 쓰여 진 시대적 배경, 책이 차지하는 지식사적 위치와 의미, 해당 책이 전하려는 요지와 저자가 그 책을 통해 길어낸 통찰을 유려한 문장으로 전한다.
저자가 선택한 책들은 저자의 사유를 거쳐 저자의 팬 끝을 통해 저자의 문장으로 재탄생한다. 한 권의 책은 필로소포스를 경유해 또 다른 책이 된다. 책 표지가 표현한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필로소포스가 철학의 숲으로 들어가 사유의 나무들 사이로 오래도록 거닐고 머물며 잉태한 사유의 열매들이 페이지마다 붉게 열려있다.
그 사유의 정원으로 초대된 독자는 손을 뻗어 그 열매를 베어 물고, 사유의 과즙을 음미한다. 이 사유의 과실들은 누군가에게는 생명의 열매가, 누군가에게는 지혜의 열매가, 누군가에게는 실천의 열매가 된다. 우리는 사유와 언어로 살고, 깨닫고, 실천하는 존재들이다. 철학의 숲으로 들어가니 사유의 향연이 열리고 있었다. 눈부시고 첨예하며, 달콤하고 쓰디쓴, 풍요로운 지혜의 향연.
아리스토텔레스를 알았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경탄), 이준석의 TV토론을 보고 상한 마음을 <위대한 수사학의 고전들> 편을 보고 위로받았다. 현재의 이스라엘과 <미쉬나>의 유대인과 레비나스의 타자 사이의 거리를 생각하다, 너무 아득해져서, 멈췄다. 1장은 예술론과 정치론, 종교론을 중심으로 근현대사유의 기반을 톺아본다. 2장과 3장의 흐름이 머무는 곳들에서 공감의 탄성이 연이어 나왔다. 플로티노스의 아름다움을 논하는 저자 문장의 아름다움에 관하여! 4장의 타이틀을 보고 영성과 정치라는 낯선 조합이 궁금했는데, 이내 수긍하고, 현실 정치에서 삭제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새삼 생각하게 됐다.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사유한 막스 베버의 정치 윤리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국 사유와 유럽 사유의 차이를 언어로 분석한 줄리앙의 연구도, 영성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를 분석한 김상봉 교수의 책도 무척 흥미롭다. 휠더린과 한용운을 다시 읽고 싶어져 마음이 급해진다.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를 다룬 마지막 장에서 저자는 한국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의 피와 함께 리영희 선생의 혼을 먹고 자랐다고 말한다. 이 장에서 저자가 일별하는 한국 현대사와 주변국들과의 관계를 읽는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어떻게 쟁취한 독립이고, 어떻게 이룩한 민주공화국과 헌법이며, 어떻게 지켜낸 민주주의인가. 저자 말대로 선대의 피와 혼이 살린 국가이고 민주주의이다. 저자의 우려처럼 ‘거짓이 활보하고 추한 권력이 위세를 부리는 시대’이다. 하지만 저자의 단언처럼 ‘수난과 저항과 투쟁 속에서 형성해 온 우리 자신의 역사에 대한 믿음이야말로 우리 영성의 알맹이다’
저자의 안내대로 사유의 숲을 걷다보면 지혜의 나무들 아래로 뻗은 뿌리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종교와 과학, 정치학와 역사학, 신화와 미학, 철학과 문학. 이 책의 미덕은 학문들 간 사유의 맥락이 시공간을 넘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준다는 것이다. 하이데거 철학 속 휠더린의 시학. 아리스토텔레스 동물학과 중세 연금술과 근대과학의 연결고리, 레비나스의 현상학 속 유대교 법전, 19세기 클라우제비츠의 전쟁론을 완성시키는 20세기의 르네 지라르. 동서양의 사상이 만나 발효되는 다산의 ‘논어 읽기’. 이런 발견은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인간이 지혜를 찾아 심은 사유의 씨앗들이 풍성하게 자라 울창한 사유의 숲이 되었다. 지혜의 나무들은 어느 것 하나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타 학문들과 주고받는 영감과 그 화답들은 서로에게 양분이 되어 사유의 숲을 더욱 울창하게 가꾼다. 이 책이 말하는 철학의 숲은 단지 비유가 아니다.
우리를 분노와 불안으로 내몬 정치가 망각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 각자도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책은 일깨운다. 사유하지 않는 정치가와 시민은 공화국의 가장 위험한 존재이다. 저자에 의하면 한나 아렌트는 평범한 악의 근원을 ‘사유 능력 없음’에서 찾았다. 사유 능력이란 상상력, 즉 나를 뛰어넘어 타자의 처지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다. 김상봉 교수는 영성을 세계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정신의 능력으로 정의한다. 레비나스에게 주체는 존재자 전체를 장악하는 근대적 주체가 아니라 무한을 향해 나아가는 윤리적 주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고대에서 현대까지 다양한 학문을 횡단하는 이 책이 보여주듯 우리는 선대부터 이어온 사유의 얼개가 주조한 존재들이다. 사유의 유산과 능력을 폐기해버린다면, 우리는 어떤 존재들이 되는 걸까. 우린 어떤 존재들이 되길 원하는가. 안팎으로 어수선한 지금이야말로 차분하게 우리의 지혜를 모아야 한다. 다행히 이렇게 은혜로운 사유의 숲이 책 한 권에 숨 쉬고 있다. 힘차게 가지를 뻗으며 푸른 잎과 다채로운 꽃들로 수런거리는 지혜의 나무 아래를 걷고 싶다면, 이 책을 펼치시라. 내 시선과 손이 그 나무들에 닿는 순간, 내 정신에도 푸른 잎이 돋아난다. 나도 그 숲의 일원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