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밖에 나가면 볼거리, 먹거리가 천지이고, 매스컴 속 세상은 화려하고 윤택하기만 한데, 속살을 들여다보면, 여기저기 살기 힘들다는 아우성이 배음처럼 깔린다. 살기 힘들다는 말 속에 내포된 복잡한 맥락을 생각하면 더 숨이 죄어온다. 기술과 문화의 드라마틱한 발전으로 삶이 누릴 수 있는 편리성과 유희성은 가파르게 상승한 반면, 우리의 삶은 더 쫓기고 마음자리는 강퍅해졌다.
안호기 기자의 <성장이라는 착각>. 맺음말의 타이틀 “성장, 인간이 만들어낸 퇴행”을 보고 반가웠다. 나는 언젠가부터 세계가 퇴행 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자연은 끊임없이 파헤쳐지고 오염되고, 기온은 오르고, 숲은 불타고, 동물들은 비명을 지른다. 공동체는 사라지고, 타자의 의미는 빛이 바랬다. 관계의 중심에 타산이 들어앉고, 삶의 의미가 경제적 성과로 평가되며, 사회적 신뢰를 좀먹는 사건들이 연이어 일어난다. 약자에 대한 착취와 혐오, 폭력이 난무한다. 이것이 성장의 그늘이라면, 이런 성장을 반겨야 할까. 인간과 비인간 존재들을 연료로 몰아붙여 얻어낸 성장은 그 자체로 퇴행이다.
머리말에 소개한 ‘이스털린의 역설(Easterlin Paradox)’과 우리 사회의 현실 지표를 통해 저자는 말한다. “소득이 늘어도 시민의 행복은 늘지 않고 있다.” 지구와 시민의 삶을 볼모로 진행되는 성장 신화에 저자는 의문을 제기하고 그 출구로 “탈성장”을 제안한다.
탈성장 논의는 “선진국 또는 비슷한 수준으로 산업화한 국가들의 경제 성장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저자에 따르면 탈성장은 정치, 경제, 사회 시스템의 근본적인 재편을 통해 사회를 공정하고 민주적으로 만들어 성장 없이도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구성하는 것이다.
사회를 유지, 진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퇴행시키는 성장 담론은 이제 적극적인 질문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저자는 그 시작으로 탈성장을 공론장으로 끌어오고, 자본주의의 대안을 논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자기 착취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탈성장과 자본주의의 대안을 모색하는 이 책의 문제의식에 나는 깊이 공감한다.
적당히 편리해지고, 적당히 즐기고, 적당히 일하고, 더 많이 심심하고 빈둥거리는 삶을 나는 희망한다. 저자가 안내하는 대로 성장에 포획된 현실을 진단해보고, 대안 담론들의 현재 위치를 가늠해 미래를 예측해 볼 예정이다.
저자 안호기 선생은 경제부장, 경제 에디터, 논설위원, 편집국장을 거친 경향신문 기자다. 경제 문외한인 나는 경제 관련 글 앞에서는 일단 주눅이 든다. 하지만 머리말을 읽었을 뿐인데 배테랑 언론인의 간명한 문장과 명확한 논리가 나를 안심시켜준다.
잘못된 환경론자들, 환경PC주의, 환경카르텔이라는 단어를 대선토론회에서 들은 신선한 충격이 가시지 않는다. (전혀 신선하지 않았고, 경악했다.) 퇴행의 상징적 장면이 생중계된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런 수사조차 혐오와 선동으로 몸짓을 부풀려온 정치꾼에게 득이 될까 우려된다.)
손에 잡히지 않는 저 높은 곳에서 날카롭게 빛나는 성장을 잡겠다고, 인간과 비인간의 땀과 피, 뼈와 재로 탑을 쌓아 기어오르자고 선동하는 자들에서 고개를 돌려, 이 책을 읽는다. 혐오를 혐오로 되갚지 않기 위해, 일단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공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