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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lle_fille_님의 서재
  • 존재의 대연쇄
  • 단요
  • 15,750원 (10%↓870)
  • 2026-06-23
  • : 1,395

*해당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블라인드 가제본을 제공받아 읽고 주관적으로 작성하였습니다.


2000년대 초, ‘나’는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오래된 유선전화기를 발견한다. 별생각 없이 콘센트에 꽂아 본 순간, 신호음 대신 한 남자의 자동응답 메시지가 흘러나온다.


“본좌는 가이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 게르마니쿠스, 가이우스 황제다.”


로마 제국의 황제 칼리굴라. 후대에 폭군으로 남은 인물의 목소리가 21세기 서울의 낡은 전화기에서 들려온다.


소설은 여기서부터 설명을 멈춘다.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어떤 법칙을 거쳤는지, 왜 하필 칼리굴라인지 친절하게 해설하지 않는다. ‘나’는 그저 수화기를 들고 말을 걸기 시작하고, 그렇게 기원후 41년의 로마와 2000년대 초 서울은 전화선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진다.


이 무심함이 이 소설의 가장 대담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타임슬립물이라면 마련해 둘 법한 장치도, SF라면 갖췄을 법한 과학적 근거도 없다. 대신 소설은 로마 황궁의 암살 음모와 현대 서울의 이별을 같은 무게로 나란히 놓는다. 둘은 서로를 해설하지 않지만, 읽는 사람은 그 낯선 병치가 결국 같은 종류의 고독을 말하고 있음을 조금씩 알아차리게 된다.


칼리굴라는 신이 되고 싶었던 인간이다. 가장 높은 권력을 쥐었지만, 결국 인간으로 죽을 운명 앞에서 자신을 이해해 줄 단 한 사람을 갈구한다. ‘나’는 반대편에 있다. 살아 있는 연인에게는 끝내 솔직해지지 못하면서, 죽은 황제의 자동응답기 앞에서만 마음을 털어놓는다. 둘 다 누군가에게 닿고 싶지만, 닿는 방식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가 칼리굴라에게 미래를 알려 주는 장면은 이 소설에서 가장 이상하고 아름다운 순간이었다. 금속활자와 암모니아 합성법, 0과 1로 모든 정보를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두서없이 늘어놓는 장면에서 이것이 SF인지, 역사소설인지, 뒤늦게 도착한 러브레터인지 분간이 흐려진다. 아마 그 분간 불가능함이야말로 이 소설이 끝내 도착하고자 하는 자리일 것이다.


장르를 가르는 일을 멈추었을 때, 비로소 이 소설은 더 선명하게 읽혔다. 가장 비현실적인 설정으로 가장 현실적인 고독에 닿는 이야기. 마지막 문장을 읽고 나서도 한동안 “괜찮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하게 되는 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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