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었던 극적 사건으로 헤어진 부부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다가 주고받게 되는 편지들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제목이 금수강산의 금수라서 뭔가 되게 고풍적이면서 아련하고 아름다운 그런 사랑 이야기일 거라고 생각했다. 혹은 한 쌍의 부부가 곱게 늙어가는 이야기가 잔잔하게 그려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읽어보니 이야기는 내가 기대했던 것과 너무 달랐다.
달랐다고 나빴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니 오히려 일본 소설 내지는 일본 미학의 독특함이 잘 드러난 것 같아서 좋았다. 나는 일본 소설을 아주 많이 읽은 것도 아니고, 일본 예술을 잘 아는 것도 아니지만, 일본 소설을 읽고 일본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것은 적어도 우리 나라 소설이나 영화, 혹은 그 이외 나라의 소설이나 영화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삶의 진실에 대한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묘사들이다. (특히 이 소설에서 옛 남편 아리마 야스아키가 자신이 묵었던 낡은 숙소의 방에서 고양이가 쥐를 잡아먹는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우연히 마주친 옛 남편에게 여자가 편지를 보낸 것은, 그들이 이혼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는 사건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남편이었던 그 남자가 여관방에서 술집 여자와 잠이 들었다가 그 술집 여자가 휘두른 칼에 맞아 거의 죽었다 살아난 그 사건에 대해 여자는 제대로 묻지도 못했고 이혼을 했던 것이다. 하지만 편지에는 단지 그때 그 사건에 대한 물음만 담긴 것이 아니라, 당시 자신의 상황과, 자신의 아버지의 상황, 그리고 현재 재혼해서 장애가 있는 아들을 기르고 있는 엄마로서의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그리고 남자의 답장은 그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의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 자신의 친구였던, 그러나 술집 여자가 되어 있던 그녀와의 불가해한 관계들까지 써내려 간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들 위로, 서로의 현재 상황과, 이혼 후 현재까지 이르게 된 경위들이 또 다시 겹쳐진다. 그러면서 점점 더 명확해 지는 것은, 삶은 불가해하다는 것이다. 불가해한 사건에 대한 해명을 듣고 싶어서 썼던 편지와, 그것을 해명하려고 썼던 답장으로 시작된 서신 왕래는 결국 더 많은 삶의 불가해함만을 해명한 채 끝을 맺는다.
하지만 소설이 그저 삶은 불가해한 것이라는 절망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편지를 통해 삶의 불가해함을 납득하는 데 도달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남자의 현재 동거녀와, 여자가 현재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의 역할이 나에겐 각별하게 느껴진다. 뭔가 모자란 듯한 동거녀와 정신박약인 장애인 아들. 현재의 남자와 여자는 이 원하지 않았던 존재들에 기대어 이 불가해한 삶을 살아갈 이유를 다시 얻는다. 사실 그 과정 또한 불가해하기만 하다.
한때 연인이었다, 부부였다가, 이제 오래 떨어져 살아온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 왕래가 마무리될 즈음, 삶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젊을 적에는 그 불가해함이 자신을 위해 온 우주가 돌아간다는 신비처럼 느껴지다가 한 순간 그 모두가 고통으로 다가왔다가 다시 그것에서 이 땅에 발딛고 살아갈 이유를 발견하는... 그런 과정... 어찌 보면 징글징글하고, 끝끝내 알 수는 없지만, 그 너머에 다시 알 수 없어 신비로운 삶의 진실을 발견하는... 내가 생각하는 이 소설의 제목은 그러하기에 錦繡이다. 아름답게 수놓여지는 삶. 한땀한땀 스스로에게 놓게 되는 고통의 자수이지만 그러하기에 아름다운... 나이드는 것이란 그것을 납득하고 알아가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것은 때로 그토록 선연한 핏빛의 고통이거나 잔인함을 동반할지도 모르겠으나... 아니 동반해야만 하는 것인지도.
아마 이 편지는 제가 보내는 마지막 편지가 되겠지요. 저는 이 편지를 우체통에 넣으면 미용실 간판을 찾아 다음 목표 지역인 네야가와 시의 모든 길을 터벅터벅 계속 걸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