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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충좌돌

사유와 명상, 마음 챙김을 통한 내면 정화가 일어나야 우리 마음이 변하게 된다. 우리 마음에는 내면의 숲, 이너포레스트가 존재한다. 그 숲이 긍정으로 채색되어야 한다. 풍요로 채워지고, 감사로 물들어야 한다. 그때 이 마음이 또 다른 세상을 펼쳐내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 변화는 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 무의식의 밭에 뿌려진 생각의 씨앗이 싹이 트고, 가지를 뻗어, 열매 맺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이 보통 7~8년 이상이다.
깨달음은 머리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경험을 통한 지식의 체득 과정에서 몸으로 느끼고 마음에 각인될 때 나타난다. 마음의 자각은 ‘아, 그렇구나’의 순간이다. 그것이 깨달음의 시작이다.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돈오(頓悟)’다. 문득 알게 된 깨달음에 마음이 설렌다. 지혜의 지식이 머리가 아닌 가슴을 울리는 순간이다. 그 순간을 기억하며 이제는 그 자각을 쌓는 시간이 필요하다. 체득된 지혜를 쌓아가는 과정, 그 증득의 과정이 바로 마음 공부다. ‘점수(漸修)’의 시간은 이 기간을 통해 쌓이게 된다. 머리로 취득한 지식을, 몸으로 체득하며, 마음에 증득하는 시간이 수행이다. 그렇게 마음에 쌓은 무의식의 씨앗이 시간을 지나 내면의 숲을 이루고, 그 숲에 부는 바람이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의 생각, 감정, 느낌은 이 바람에서 시작한다. 마음의 숲이 긍정으로 채색되고, 풍요로 채워지고, 감사로 물들 때, 우리에게 긍정의 생각, 풍요의 감정, 감사의 느낌이 나타나게 된다.
마음의 풍요가 현실의 풍족을 떠오르게 한다. ‘떠오르는 것’, 그걸 우리는 부유라고 한다.

철 속의 공기가 배를 부유(浮遊)하듯 마음의 무의식이 나를 부유(富裕)하게 한다.

부유한 삶은 마음의 풍요가 만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하나다.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내면을 바꾸는 것이다. 우리의 이너포레스트를 풍요로 채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지구별 여행의 가장 의미 있는 일이다. 마음의 풍요, 그 보이지 않는 무의식의 에너지가 우리를 최고의 부자로 떠오르게 한다. 그것이 바로 부력(富力)이다.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정답은 이거다. 사는 이유는 없다. 그냥 살고 있으니까 사는 것이다. 이미 태어났으니 그냥 살고 있다. 그러다 죽음이 찾아오면 별 이유 없이 죽는 것이다. 죽는 이유가 없듯이 사는 이유도 없다.
지금 자신의 손을 보라. 손이 존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악수하기 위해서? 밥 먹기 위해서? 글쓰기 위해서? 그렇지 않다. 손은 그냥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그냥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태어났다. 악수하려고 손이 있는 게 아니다. 숟가락 때문도 아니고, 펜 때문도 아니다. 그냥 있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사는 것도 똑같다. 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내가 부여할 수 있다. 나는 그 삶을 행복으로 채우려 한다. 행복하게 사는 게 내 삶의 의미와 가치다. 그리고 그 행복한 삶을 위해 나는 풍요를 추구하고, 감사와 함께한다. 풍요를 통해 세상에 나눔을 실천하고, 감사를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why’ 없는 삶에 ‘how’의 가치를 담고 있다.
존재가 이유를 선행한다. 우리는 이미 존재하기에 존재의 이유를 묻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손은 있으니까 있는 것처럼, 삶은 생존하기에 있는 것이다. 죽음의 인연이 다가오면 우리는 그 존재를 다하게 된다. 그러니 사는 이유를 찾을 시간에 어떻게 하면 행복할지 고민해보라.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살아 있다는 게 행복한 것이다. 행복은 경험이고, 경험은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러니 그 경험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에 감사하고, 즐겁게 말하고, 행복하게 지내보자. 그러면 알게 된다. 세상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 살아 있다는 단순한 기적과 볼 수 있다는 황홀한 축복, 말하고 움직일 수 있는 자유로움에 감사하며 세상을 바라보자. 행복으로 물든 세상이 눈앞에 펼쳐질 것이다. 지구는 46억 년째 돌고 있다. 고작 100년 사는 인생, 행복하게 살자.
우리는 모두 시한부 인생을 산다. 그 여생의 기간이 다르고, 선고를 받지 않은 것의 차이일 뿐이다.
누구나 죽음은 무섭고, 허망하다. 그래서 죽음은 떠올리기 싫고, 입에 담기도 무서운 단어다. 엄마가 살아 계실 때, 엄마의 죽음을 절대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에게도 죽음은 단어 자체가 주는 위압감이 있었다. 두려움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삶에 가장 두려운 존재가 죽음이라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인생이 짧다는 것은 이야기가 짧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풍성하게 채우는 것, 나의 언어로, 나의 문장으로 나의 스토리로 채우는 게 우리의 삶이다. 그건 시간의 길이와 무관하다. 하루를 살면서 100개의 스토리를 채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00일을 살면서 하나의 이야기밖에 없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삶의 차이고, 더 정확히는 삶의 속도 차이다.
가난한 삶은 없다. 삶에 대한 해석이 가난할 뿐이다. 괴로운 삶은 없다. 삶을 괴롭게 분별하기에 그런 시간을 보낼 뿐이다.
삶이 한 편의 영화임을 알 때, 우리는 그 영화를 즐길 수 있다. 우리가 그 영화의 감독이고, 그 영화의 비평가며, 그 영화의 관객이다. 세상은 사실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텅 빈 스크린은 영화에 물들지 않는다. 단지 우리가 만든 영화가 그 위에 방영되고, 우리는 그것을 즐기고 있다. 그러니 너무 무겁게 살지 말자. 가볍고 즐겁게 살자. 우리 영화 보러 갈 때 즐거운 마음으로 간다. 우리 꿈꿀 때 진지하게 꿈꾸지 않는다. 즐겁게 영화를 보고 가볍게 꿈을 꾼다. 그렇게 살자. 그것이 우리 삶이고, 우리 인생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여기에서 온다.

우리는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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