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우충좌돌

사소한 생활의 무게가 나의 존재를 지탱해 주었다면, 이제는 그보다 더 본질적인 무언가가 필요했다. 일상에만 머물러서는 이곳에서의 시간이 금방 소모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단단한 뿌리를 내렸다면 이제는 위로 뻗어 올라가야 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나를 새로 세우는 계획을 세워보고 싶었다. 삶의 여러 면을 조금씩 확장해보는 프로젝트.
나는 듣기(리스닝)와 읽기(리딩)에만 최적화되어 있는 보통의 대한민국 1990년대생 수능 세대였다. 본격적으로 ‘말하기(스피킹)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럴 수가, 그동안 영어에 투자한 시간과 돈이 얼마나 되는데, 표현하고 싶은 고작 한 문장을 말하는 데에 그보다 더 큰 에너지가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때 필요한 건 뻔뻔한 마인드다.
그 다음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 이것이 필요했다. 진정한 독립은 경제적 독립에서 출발할 테니까. 결혼했다고 끝이 아니다. 각자가 온전히 1인분의 몫을 하는지의 여부가 여기에서 결정된다. 자아실현이라는 거창한 명분 이전에, 남편과 동일한 종류의 워킹비자의 유용함을 발휘하겠다는 야무진 다짐 이전에, 말 그대로 내 통장에 쌓일 월급을 벌어야만 했다. 당장 카페에서 커피를 살 수 있고, 커뮤니티 형성을 위해 지출해야만 하는 최소한의 실질적인 소득이 절실했다.
비록 저축으로 모아둔 통장 속 숫자는 조금씩 적어졌지만, 내 돈을 아껴 내 자존감을 쪼그라들게 만드는 것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일단은 돈으로 내 자존감을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도전해 볼 수 있는 일의 영역은 제한적이었다. 자격증이나 이곳에서의 학위, 업무 경험을 크게 필요로 하지 않는 서비스업이 그나마 적당해 보였다.
언어를 배우고 돈을 벌고… 이제 다음 과제는 바로 친구를 만드는 일이었다.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 이건 일을 구하는 노하우를 얻는 일보다 더 어려워 보였다. 돈으로 친구를 매수할 수는 없지 않는가? 그러니 언어도 어설프고, 신분도 어정쩡한 이방인을 누가 기꺼이 친구로 받아줄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이 도시에서 나만큼 관계가 간절한 사람이 또 있을까 싶었다.
또다시 나라는 사람의 쓸모를 증명해야만 했다. 그것도 훨씬 난도가 높은 상황에서 말이다. 제네바에서는 한국에서 이력서에 적힐 법한 스펙은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직관적으로, 지금 당장 보여줄 수 있는 가치를 내세워 사람을 모아야만 했다. 뭐가 있을까? 정답은 가까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한국인’이라는 점이었다.
외국어 공부, 취업, 친구 만들기. 다방면의 명품 되기 프로젝트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의 진지한 태도는 나에게도 새로운 자극이 되었고, 나는 이 만남이 단순한 호기심을 넘어선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될 수 있으리라 예감했다. 비록 처음 만난 사이일지라도, 어떤 밀도 높은 대화는 나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로 다른 언어권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의 융합만으로도 새로운 지식과 문화가 교환되는 장이 열릴 것이라는 기대도 있었다.
만남은 성공적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기대 이상이었다. 이들과의 교류를 통해 나는 새삼 깨달았다. 진짜 성장은 겉으로 드러나는 성취가 아니라, 언어와 문화, 경제와 사회라는 서로 다른 축들이 안쪽에서 단단히 맞물릴 때 이루어진다는 것을. 본질에 투자하는 과정이야말로 나를 지탱할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그렇게 나는 지금 이 소중한 시간들을 단순한 경험의 나열로 두지 않고, 삶의 토대를 깊이 다져가는 기회로 삼기로 했다.
증명할 것이 없고 가진 것이 부족할수록,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크면 클수록, 더욱 그럴듯하게 보여야 한다. 자신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아 스스로 새로운 삶을 창조했다고 말한 프랑스 디자이너 가브리엘 샤넬의 말처럼 말이다. 고아원에서 자라며 세상의 벽이 얼마나 높고 차가운지 누구보다 일찍 알아버린 샤넬은, 그래서 남들보다 더 절실하게 위로 올라가고 싶었기에 그럴듯해 보이는 법부터 연습했다고 한다.
잘 안 풀리는 일들에 대해서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버리기로 했다. 그래서인지 그런 기억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너무 하나하나 따지고 기대하다 보면, 오히려 손익 계산이 철저해져 손해 보는 것이 두려워 이런 행동이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도전해볼까 말까 고민만 하다가 결국 아무런 지출이 없는 건, 아무런 소득이 없다는 것과 똑같은 의미다.
있는 척이 아니라, 결국 ‘있게 된’ 사람으로.
새 공유오피스에서 나는 본격적으로 인맥을 쌓아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사람들에게 가장 직접적이며 직관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보이는 외모였다. 눈·코·입이 예쁘게 생겼다거나 날씬한 몸매를 가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관리가 잘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
인생이란 결국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자신만의 확신의 범위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넓혀 나가는 과정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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