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시간 동안 이 책을 함께 만든 피해자들에게.
당신들의 경험이, 당신들의 용기가, 당신들의 삶이 다른 피해자들에게 어떤 힘이 되는지 지켜봐주십시오. 그 힘이 어떻게 시스템과 사회를 바꾸는지 확인해주십시오. 당신들의 시간이 ‘공백’이 아니었음을, 당신들의 존재가 다른 이들에게 희망임을 잊지 말아주십시오. 당신들의 연대자가, 그림자가 될 수 있도록 곁과 뒤를 내주어 감사했습니다.
이 책을 통해 만나는 다른 피해자들에게.
일단 살아만 있어요. 제가 당신의 그림자가 될 수 있게, 당신을 위해 길을 찾고 다듬어 당신의 손을 잡아 함께 걸을 수 있게, 당신의 말·시간·자리를 지킬 수 있게, 그 기회를 주십시오. 어떻게든 살아만 있으면, 일단 살아남는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더 넓고 안전한 길을 만들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제발 살아요. 우리 길에서, 광장에서 만납시다. 언제나 당신의 곁과 뒤에서 당신을 기다리겠습니다. 당신과 나는, 우리는 연결되어 있습니다.
‘법대로’ 하면 피해를 인정받고 내 삶을 찾을 줄 알았는데 여전히 싸워야 했다. 왜 끝나지 않는 것일까. 끝은 있는 걸까. 싸움에서 이겼는데 왜 난 여전히 말과 시간, 그리고 자리를 찾지 못하는 걸까. 왜 난 아득바득 ‘예민하고 끈질긴 미친년’이 되어 이 싸움을 하는 걸까. 이 싸움이 가치가 있나.
차라리 죽여버릴 걸.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다시 한번 국가기관은, 시스템은 피해자 보호에 관심이 없다는 것만 깨달았을 뿐이다. 내가 가해자에게 보복 살인을 당한다면 이 경찰은 뭐라고 할까. 아마 원칙대로 처리했으며, 실질적인 위협이 없을 경우 본인들은 개입할 수 없다고 하겠지. 그리고 내 사건은 가해자에 의해 각색되어 세상에 알려질 거다. 죽은 피해자는 말할 수 없으니까.
사건을 겪고 해결하는 동안 가족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가족은 내가 기댈 수 있는 울타리가 아니라 책임져야 하는 이들이었다. 일을 그만두고도 한동안 출근 시간에 맞춰 집을 나섰다가 퇴근 시간에 돌아왔다. 도서관을 돌아다니며 소송 서류를 작성하다가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기를 반복했다. 세상은 온통 버석거리는 모래로 만든 성 같았다. 색도, 향도, 맛도 그 어떤 감각도 느낄 수 없었다. 감정은 말라갔고, 머리도 굳어졌다.
귀가 후 인사를 한다. 나는 아무 일도 없어야 한다. 가족들이 알면 안 된다. 밥은 먹고 다니냐며 잔소리하는 가족의 말을 뒤로 하고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간다. 내 방문을 열면 거기에는 안온하면서도 끔찍한 늪이 기다리고 있다. 그 늪에 나를 가둔다. 울지도 않는다. 어느새 우는 방법도 잊은 것이다. 이렇게 늘어져 있다가 사라지고 싶었다. 겨우 몸을 일으켜 옥상으로 올라갔다. 내려다보며 문득 편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나. 내가 왜 이래야 하나. 내가 많이 무너져 있구나. 치료가 필요하다. 이러다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몰리겠다. 방법을 찾아야 한다.
성폭력 피해 이후 말과 글이 무너졌다. 완성된 문장으로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고 단어 위주로 내뱉거나, 핵심을 말하지 못하고 장황하게 늘어놓기 일쑤였다. 감정은 메말라 내가 어떤 기분인지 전달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내 생각과 감정을 드러낼 곳이 필요했다. 출소한 가해자로부터 안전한 익명의 공간. 짧은 글을 연습할 수 있는 곳. 그렇게 찾아다니는 내게 누군가가 ‘트위터’를 소개했다. 하지만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조차 해보지 않은 내게 SNS는 낯설고 버거웠다. 닉네임을 정하는 것도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결정한 게 바로 ‘마녀’였다. 가해자가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 나를 조롱하며 붙였던 이름. 그래, 그렇다면 진짜 ‘마녀’가 되자. 피해자가 아니라 심판자로서, 사냥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로서 사냥을 시작하자.
다이어리를 꼼꼼하게 작성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수기로 작성하는 것이 귀찮을 때도 있었지만, 신체의 말단 부위를 자극하고 움직이는 것은 늘어져 있던 내게 중요한 일이었다. 사건 이후 지능이 떨어져 예전엔 듣고 바로 기억하던 것들도 메모를 해야 겨우 알아보는 수준이 되었던 터라, 직접 써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난 과거의 나와 매우 달라져 있었다. 사건이 있기 전에 하던 일을 이어서 하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 일을 할 역량도 되지 않았다. 일정 부분에서 사건 이전으로 회복되지 않는 손상이 발생했고, 문제를 해결하며 입은 상처 중에는 영구히 그 흔적이 남는 것도 있었다. 과거의 나는 과거에 두고 와야 했다. 그걸 인정해야 했는데, 내 시선은 자꾸 과거를 향하려 했다.
난 가해자를 용서할 생각이 없다. 사법 시스템을 선택한 것이 내가 베풀 수 있는 관용의 최대치다. 나는 가해자와의 싸움에서 얻은 경험과 지식을 다른 피해자와 연대하며 시스템을 바꾸는 기반으로 삼고 있다. 그것이 ‘마녀’로서 내가 가해자를 사냥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사냥을 멈출 생각이 없다. 사람들과 건배사로 하는 말이 있다. "돌아온 마녀가 세상을 태운다!" 그렇게 정화된 땅에서 피해자들이 안전하고 행복하게 살아가도록 만들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