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바이올린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한국의 현악기 사대주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세계에선 다 아는 일. 한국인이 만든 악기는 아무리 뛰어나도 거래가 뜸하다. 그처럼 손으로만 깎고, 최상품 재료로 만든 고급일수록 국산은 더 외면받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러하다. 엉터리 외국 악기도 거간이 붙어서 아주 비싼 값에 매매된다.
그는 악기마다 꿋꿋하게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다. 배운 학교가 있는 도시 이름 ‘구비오’에 덧붙여서. 최상의 소리를 내는, 과르니에리와 스트라디바리우스식 악기가 그의 제작소에서 세월을 얻어간다. 그는 잘 팔리지 않는 악기를 끊임없이 만든다.
63세 시인 성백술. 앞에서 내가 ‘만술이형’이라고 한 그의 본명이다. 그는 시집을 두 권 냈다. 산막리는 영동 산골짜기 그의 고향이다. 서울에서 그는 끝내 배척되거나 스스로 배척했고, 고향에 갔다. 거기서 그의 이름은 산불감시원 무전 호출부호인 ‘봉선화 58호’이기도 하다. 공공근로 산불감시원을 하며 농사도 조금 짓고 복숭아나무도 심고 공장에 가서 시간제 일도 하고 마을 구판장도 운영하고 그렇게 산다. 억울하게도 세상이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그를 너무도 좋아한다. 그의 이름을 거꾸로 하면 술백성. 입에 올려서 발음하면 술 생각도 나고, 무지 보고 싶어서 울컥하기도 하는 이름.
친구는 냉장차를 두 대나 사서 전국으로 배달을 다녔다. 그때가 아마도 인구의 정점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잘 사는 줄 알았던 친구에게서 돈 꿔달라는 전화가 왔다.
나는 종종 그를 만나러 그 집에 갔다. 화분 밑에 숨겨둔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수업을 마친 그가 왔다. 전화도 없던 때니까 밤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술을 마시고 밤에 귀가한 그가 깜짝 놀라면서 엄청 반가워했다. 늘 그랬듯이.
"찬일아! 미안하다, 야."
하긴 그 형은 누구에게나 잘했다. 미움이라는 게 없는 사람 같았다. 세상은 그를 사랑하는 것 같지 않았지만.
소주잔을 놓고 친구는 한숨을 쉬었다.
"요샌 배달차 몰고 배달 대신 돈 받으러 다닌다. 물건 받아간 뷔페 사장들이 다 잠수를 탔어. 곧 나아질 테니 좀 빌려줘."
몇 억씩 여러 건을 물렸다고 했다. 뷔페는 싼 재료를 대량으로 사서 쓴다. 이윤은 박한데 금액은 크다. 한두 곳의 거래처만 망해도 충격이 크다. 음식 시장은 서로 물리고 물려 있다. 작은 전문 재료상-유통 재료상-식당의 구조인데 한 군데가 망하면 연쇄적으로 부도 위기에 몰린다. 뷔페 전문인 친구는 시대의 끝물을 탔다. 더 이상 사람들이 뷔페를 가지 않는다.
미수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이 바닥에서도 사람 좋으면 꼴찌가 되는 법이다. 집도 차압당했다. 친구가 마지막으로 우리들, 그러니까 오랜 친구들에게 돈 빌려달라고 전화한 것은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기 위해서였다. 회사가 망하는 판에 그는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다가 거래처 빚을 갚았다. 그러고는 주변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마지막으로 직원 월급을 주려고 했다. 상가에서 만난 동창은 혀를 찼다.
"자기 사업 망하는데 직원 월급 걱정하는 인간은 처음 봤다."
상가는 북적였다. 마치 호상 같았다. 바보 같은 친구가 뿌린 씨앗이었다. 오죽하면 절하며 통곡하는 사람이 전직 직원들이었다. 사람 좋으면 꼴찌가 아니라 첫째다. 저승에 제일 먼저 간다고 누가 혀를 찼다.
돌아서는데 부인이 울면서 우리에게 한 장씩 봉투를 주었다. 지방에서 종종 보듯, 답례 교통비 봉투인가 했다. 삼우제에 친구들이 다시 모였다. 큰돈을 친구에게 빌려준 녀석들이었다. 답례 교통비 봉투에는 친구의 사과 편지가 들어 있었다. 여덟 장의 편지를 모아 삼우제를 한 사찰 마당에서 태웠다. 친구의 마지막 밤은 그 편지를 쓰는 시간이었다. 광풍 같았던 뷔페의 시대는 흘러갔고 친구도 갔다.
기레빠시 파스타는 위트 있지만 요리사의 근무 상황을 풍자한다. Spaghetti Alla Kirepassi. 써놓고 보니, 아주 근사한 아랍풍 건물에 들어 있는 시칠리아 식당의 메뉴 같다. 하기야, 그런 식당에서도 요리사들은 ‘빠시’로 만든 스파게티를 먹는다. 이건 틀림없다. 미슐랭 3스타짜리 식당도 거기서 거기다. 절대로 거위 간 소스의 스테이크를 먹을 수는 없다.
친구의 전화가 더 이상 걸려오지 않았다. 우리는 두려웠다. 예감이란 틀리지 않는다. 우리는 친구의 상을 치렀다. 상가에 문상객이 많았다. 육개장과 편육에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좋은 사람은 먼저 데려가는 거여."
친구는 꿈이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좋은 회사를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작은 판매회사에서 대기업을 흉내 내어 직원들에게 ‘체력단련비’를 지급한 게 녀석이었다.
그러나 시장은 오래 버텨주지 않았다. 친구는 가정용 컴퓨터 시장의 발흥과 몰락을 다 지켜보았다. 바꾼 업종은 식재료 도매업이었다. 발 빠르게 좋은 시장으로 갈아탄 것이었다.
요리사 모임은 야밤에 시작한다. 손님 다 가고, 결산까지 마쳐야 슬슬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 코로나 시절에는 모이지도 못했다. 일 끝나면 전국의 술집도 ‘셧다운’이었다. 불 꺼진 식당 탁자에 각자 앉아 제사 지내는 것처럼 ‘깡술’ 한잔씩 놓고 마셨다. 음울할 때였다. 끝이 보이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