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힘든 게 음식이었다. 매일 오일에 버무린 스파게티와 송아지고기를 먹었는데 이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람이 살 수가 없었다. 송아지고기는 싸고 간단하게 요리할 수 있어서 주인이 매일 주다시피 했다. 동네에 한식당은커녕 중국식품점도 없었다. 음식이 안 맞으니, 안 그래도 마르던 몸이 피골상접 상태로 가고 있었다. 매일 열 몇 시간씩 일하지, 제대로 못 먹지(송아지고기밖에 먹을 게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쉬는 날에는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삐걱거리는 싸구려 침대 밑에 전갈과 도마뱀이 돌아다니는 방에서.
그렇게 지쳐가고 있을 때였는데, 가게에 웬 소포가 도착했다. 열어보니 고추장 1킬로그램과 마른 멸치였다. 어떻게 알았는지, 서울의 그 녀석이 보내준 것이었다. 운송료가 고추장과 멸치 값의 열 배는 들었을, 지구를 반 바퀴 돌다시피 해서 녀석의 마음이 왔다. 밥을 지어서 고추장 두 숟갈쯤에 멸치 몇 개를 부수어 넣고 엑스트라버진 최상급 올리브유로 비볐다. 먹는데 눈물이 났다.
정작 한국에 와서 진짜로 크게 울어버리는 일이 생겼다. 녀석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저세상으로 떠나버린 것이었다. 영정 안에서 웃고 있는 후배를 보니 심장이 턱 막혔다. 요즘도 마트에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내게 보내준 것과 똑같은 빨간 상표 고추장을 볼 때마다 나는 발바닥이 쑤욱 꺼지는 것 같다. 사람은 기왕이면 오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주변 사람들에게 나쁜 기억도 막 쌓아서 나중에 죽어도 아무런 미련을 갖지 않게 하는 게 좋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
며칠 전에 이 글을 쓰려고 녀석과 추억이 있는 장소를 휘 돌아보았다. 청파동의 포대포라는 돼지껍데기 집이다. 좁은 자리에 다닥다닥 앉아서 피어나는 연기에 눈물을 질금거리며 껍데기를 구웠었다. 돼지껍데기처럼 질기게 좀 오래 살지, 뭐가 급해 그리 가버렸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녀석과 내가 만난 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새 학기가 되어 교실에 들어갔더니 맨 뒷자리가 하나 남아 있어서 앉았다. 머리를 박박 깎고, 눈빛이 번쩍번쩍하는 녀석이 짝이 되었다. 농구선수였다고 했다. 당대의 천재 선수였던 허재랑 동급생이었다. 물론 허재는 다른 학교 소속 선수였다. 경기를 많이 치렀다고 했다.
그때 우리 학급은 ‘돌반’이었다. 공부 안 하거나 못하는 애들이 모였다. 담임은 첫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였다. 기다란 몽둥이를 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나랑 붙고 싶은 놈은 계급장 떼고 해보자. 1년 조용하게 살고 싶다. 도와주라. 나, 이 학교 나온 너희들 선배잖니."
별명이 ‘카리스마’였다. 당시엔 카리스마라는 말이 흔하던 시대가 아니었다. 우리 학급은 문제 반이었다. 처음엔 한 반에 60명이던 숫자가 시간이 흐르면서 한두 명씩 사라졌다. 2학년을 마칠 무렵엔 대여섯 명 가까이 없어졌다
그런 학교에서 학생들 간수하고 분위기 잡기에는 카리스마 선생이 최고였다. 그는 매질을 별로 안 하고도 조용히 학급을 잘 이끌었다.
물론 선생님이 없을 때 툭하면 교실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얻어터진 놈은 화장실에 가서 코피를 쓱 닦고 와서 수업을 받곤 했다. 녀석은 한 번도 싸움을 안 했는데,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녀석은 내게 공부를 가르쳐달라고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운동을 하느라 기초가 전혀 없었다. 그래도 골치 아픈 수학 시간에 졸지 않는 건 반장이랑 녀석밖에 없었다. 반장은 알아들었고, 녀석은 그냥 참았다. 선생님 덜 무안하라고.
"달랑 한 명만 듣고 있으면 선생 체면이 좀 그렇지 않냐."
나는 공부하기 싫어했고, 학교에 갔다가도 대충 도망쳤다. 가끔 녀석과 교복 입은 채로 학교 뒷산의 절 밑, 사하촌에 가서 밀주를 마셨다. 어른 흉내였지만 우리는 심각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가난에 대한 서투른 절망 같은 것이었다. 녀석의 집에 처음 가서 놀란 건 키 큰 우리 둘이 그 집에서는 제대로 서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지붕이 낮았다. 라면을 끓여 양은 밥상에 놓고 먹는데, 대낮에도 천장에서 쥐가 뛰어다녔다. 나랑 비슷한 녀석이 있구나. 내가 그를 좋아하게 된 이유였다.
어찌어찌 우리는 살아냈다. 군대 갔다 오고, 대충 밥벌이를 찾았다. 녀석은 보일러 고치고 설치하는 일을 했다. 장가가고 싶어 했는데 연애를 못 하는 눈치였다. 어느 처녀가 저 가난뱅이에게 쉬이 시집오겠는가.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녀석이 장가간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내가 사회를 봤던가. 조선족 처녀였다.
신혼집에 한 번 갔었다. 녀석이 애를 많이 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둘이 잘 맞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반주로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그의 아내는, 중국 남자는 술 안 마신다고 했다. 술 좋아하는 그는 낙제였던 것 같다. 중국 남자는 술을 안 마셔요……. 그건 예감을 주기에 충분한 말이었다. 아내가 우울해한다고 녀석은 걱정했다. 안주로 오이를 내왔는데, 아내는 ‘황과’라고 했고 녀석은 ‘오이’라고 수정해주었다. 황과와 오이. 그렇게 둘이 옥신각신했다.
그러고는 이혼 아닌 이혼 소식을 들었다. 이혼 도장도 못 찍었다. 당사자가 없어졌으니 무슨 수가 있었겠는가. 실종 신고를 하지도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당시 바빴다. 가끔 녀석에게 회사로 전화가 왔다. 바쁘다, 야. 그래, 곧 갈게. 그렇게 말하고는 못 갔다. 정말 오랜만에 만나서 들어간 게 모래내의 어느 중국집이었다.
어중간한 오후, 그 시절엔 중국집 2층에서 짬뽕 국물과 군만두에 술을 마시는 사람이 많았다. 우리는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폼은 사라지지 않아서 녀석은 중국집 팔각 물 잔에 소주를 마셨다. 짜장면엔 으레 그렇듯이 얌전하게 채 썬 오이가 올라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사라진 아내에 대해, 황과와 오이에 대해 말했다. 같지만 다른 것이었다.
그날은 우울했지만 녀석과 그렇게 짜장면 안주로 재미나게 술을 마셨다. 우리는 금세 취했고, 녀석은 큰 키를 꼿꼿하게 세우고 밤길을 걸어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만난 건 적십자병원 빈소였다. 그는 끝내 아내를 찾지 못했다. 나는 그저 생존하느라 바빴다. 사고였다. 술에 취해서였는지 어쨌는지 그는 한 길가에서 트럭에 치였다고 했다. 아무런 유언도, 아내의 소식도 없이 그는 쓸쓸하게 갔다. 그의 여동생이 오랫동안 슬프게 영정 앞에서 울고 있었다. 나도 한참 울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짜장면을 안주로 술을 마시면 녀석이 생각난다. 이미 오래되었는데도 잊을 수가 없다. 이 글 초고를 써놓고 방산시장 중국집 방산분식에서 3000원짜리 짜장면에 소주를 마셨다. 잔도 없이 물컵을 주는 집. 반병씩 따라서 쭉 들이켜면 두 번에 끝난다. 잘 살고 있냐. 거긴 소주 있냐.
학창 시절에 잘 다니던 술집이 있었다. 등록된 상호는 뭔지도 모르겠고 선배들마다 개미집이라고도, 왕개미집이라고도 부르는 대학가에 흔하게 있던 아줌마 술집. 방학 때에도 돈 한 푼 없이 그 집에 가서 막걸리 한 병을 시켜놓고 공짜 깍두기에 마셨다. 막걸리 몇 병 값이 없었다. 계산을 못 하니 나가지도 못하고 저녁이 될 때까지 내처 마셨다. 기다리다 보면 졸업해서 취직한 선배가 누구라도 마치 학생처럼 왔다. 우리들 술값도 내주었다. 개미집은 그저 그런 술집이 아니었다. 우리 선배들이 공부하는 곳이었고, 사랑하고 싸우고 더러는 잠도 자는 곳이었다. 술에 취한 데다 차비도 없어서 가게 구석에서 말이다. 그런 집의 주인 내외가 병들어 가게를 그만하게 되었다.
몇 년 후, 학과 창립기념식에 그 아주머니를 불렀다. 명예 79학번인가 학사증을 준비하고 외상값을 대신한다는 취지로 금반지도 드렸다. 그 아줌마, 그러니까 실명으로 김진자 씨는 마이크를 잡고 소감을 말했다.
"79학번 ○○아, 너 뒷주머니에 돈 숨기고 술값 안 낸 거 내가 다 안다. 80학번 ○○아, 너 그때 여자 바꿔가며 데려와도 아무 말도 안 했지. 81학번 ○○아, 너는 등록금 갖고 술 마시다가 그때 휴학했지?"
비상한 기억력으로 유명한 김진자 씨는 완벽하게 왕년의 비밀을 다 떠벌릴 기세였다. 행사장이 난리가 났다. 더 심한 얘기가 나오기 전에 마이크를 뺏었는지 모르겠다. 그날 뒤풀이에서 다들 많이 취했다. 술집 주인에게 명예 학번을 헌정할 수 있는 학과를 다닌 게 우리들의 자부심이었다. 좀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더라도 말이지.
내가 사회에 나와서 밥이라도 벌어먹고, 남에게 큰 폐 안 끼치고 사는 건 거개 학창 시절 선생님들 덕이다. 어쩌면 한 인간의 미래를 만드는 건 선생님들이다.
"찬일이가 글을 따박따박 잘 써" 하셨던 초등 3학년 담임선생님, 교과서에 나온 ‘라사(羅紗)’가 양복점을 의미한다는 걸 맞혔다고 칭찬하셨던 중학교 국어 선생님(임완기 선생님) 덕에 나는 글줄이라도 챙겨서 평생 벌어먹는 재주를 얻었던 것 같다.
칭찬은 사람의 미래를 만드는 마법 같은 주문이라고 생각한다. 그 시절에는 이유 없이 학생들에게 몽둥이를 휘두르고, 어머니들 불러서 서랍 열어놓는 양반들이 적지 않았지만 스승이라 부를 선생님도 많았다. 우리는 부모님이 낳으시고 선생님이 짓는 인생이 아니었나 감히 생각한다.
선생님은 나날이 표정이 어두워지고 건강이 나빠지셨다. 왜 아니겠는가. 반 아이 쉰 명 중에 이른바 교내외 폭력서클 멤버가 열 명이 넘는, 아니면 나처럼 무단결석을 밥 먹듯 하던 아이들이 태반이던 학급이었다. 고등학생 주제에 거의 다 담배를 피워서, 쉬는 시간 화장실에서 폭연을 해댄 통에 동네 주민이 창문 밖으로 뿜어져 나온 연기를 보고 화재 신고를 한 일도 있었다.
선생님은 머리숱이 많아 백발이 더 희게 보였다. 조례가 끝나고 나랑 몇몇 아이들이 화장실에 모여서 반성과 다짐을 했던 것 같다. 앞으로 웬만하면 학교에 나오자고. 나오면 대학 가겠다고 공부하는 애들 괴롭히지 말고 뒷자리에서 조용히 엎드려 자자고. 담배 한 대를 돌려 피우면서 우리는 각오를 다졌다.
"야, 생불(生佛) 선생님 진짜 화나신 거 같다. 우리가 도와드리자."
선생님은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는데, 오죽하면 우리가 몰래 지은 별명이 생불이었을까. 선생님이 나쁜 말을 입 밖에 내는 걸 들은 적이 없다.
옛 기억이 난다. 한번은 교무실로 날 부르셨다. 그래갖고 대학 가겠느냐, 등록금이 밀렸는데 낼 형편이 안 되느냐, 그리 물으셨다. 세상에 나는 그런 근심 어린 표정을 인생에서 다시 본 적이 없다. 상담인지 뭔지 모를 대화를 마치고 돌아서던 내게 선생님이 뭘 쑥 내밀었다. 하얀 기름종이에 싸인 햄버거였다.
교무실에서 교실까지 걸으며 햄버거를 씹었다. 입가에 갈색 소스를 묻히며 먹었다. 치아에 무언가 씹혔다. 목에도 무언가 걸리는 것 같았다.
복도에서 마주치는 친구들이 심각한 표정의 내게 말도 걸지 않고 그냥 지나갔다. 안경을 벗은 것처럼, 앞이 뿌옇게 보였다. 그때는 아주 진지하게 선생님 속을 그만 썩이자고 다짐했던 것 같다.
선생님의 긴 인생의 시간에 한 점도 안 될 내가 기억되고 있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한 번도 기쁘게 해드린 일이 없었는데. 선생님을 따라 시를 썼더라면 좋아하셨을까 여쭤봐야겠다.
최근 선생님께 문자를 드렸다. 다른 친구에게도 ‘찾아가 뵙겠다고 해라’라고 독촉도 했다. 선생님은 사양하셨다. ‘내가 너희들 보고 싶은데, 지금 몸이 아파 어렵다’는 전갈이었다. 연세가 많다. 이제 다시 못 뵙는 것일까. 마음이 저만치 주저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오래전 일이다.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중세풍 도시인 구비오(Gubbio)에서 한국인을 만났다. 바이올린 같은 현악기 제작학교를 다닌다던 ‘늙은’ 학생이었다.
"부안서 왔슈. 나이가 저보다 성님이네유."
아내가 있다고 했다. 서울서 아내가 벌어 생활비를 송금해준다고 했다. 눈매가 날카로웠다. 태권도 선수로 학창 시절을 보냈다고 했다. 고등학교 졸업하고 서울에서 패션 디자인을 했단다. 어쩌다 그는 이탈리아 반도 중부의, 인심 별로인 중세풍 도시에까지 흘러들었을까. 하기야 그나 나나 피차일반이었다. 아내 뜯어서, 공부랍시고 어쨌든 이탈리아에 와 있었다. 그는 책임감이 강했다. 빨리 배워서 아내 고생을 끝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면접 보는 교장선생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 말고는 할 게 없었다.
"굳은 의지. 그런 거 보여주는 수밖에 더 있었겠슈? 안 되면 막고 품는 거쥬."
막고 품다. 도랑 양쪽을 흙으로 막고 물을 뺀 후 고기를 잡는 최후의 어로법을 이른다. 어떻게든 하자고 드는 절박감이기도 하다. 현악기 제작학교는 보통 북부의 원조 도시인 크레모나(Cremona)에 많이 간다. 한국인도 꽤 있다. 구비오는 산골에 있는 작은 도시였다. 그곳에 웬 한국인이 입학하겠다고 하니, 학교에서는 ‘붙여는 드릴게’ 이런 마음이었을 것 같다. 과연 제대로 다닐까 의심하면서 말이다.
그는 정말 절박하게 학교를 다녔다. 이탈리아 학생들보다 더 악기를 잘 만들었다. 그게 그의 승부수였다. 그를 보러 학교에 간 적이 있었다. 여전히 그는 막고 품었다.
"말은 못 해두 돼유. 악기만 잘 만들믄 돼유. 그거 말구 뭐가 있간디."
2년제 학교였다. 그는 꼴찌로 입학해서 수석으로 졸업했다. 교장은 이탈리아에서도 알아주는 명장이었다. 교장이 그의 졸업 작품 바이올린을 학교 전시실에 공식 헌정했다. 솜씨를 인정한 것이었다.
샌드위치 한 쪽으로 점심을 때우고 그는 실습실에서 나무와 다투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손으로, 옛 장인과 같은 방식으로 바이올린과 첼로를 깎았다. 도료도 접착제도 다 자연에서 얻은, 효율은 없지만 그런 미련한 재료와 제작 방식이 명품에 근접시킨다는 걸 그는 학교에서 배웠다. 과르니에리, 스트라디바리우스가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악기다.
이십 몇 년 전이다. 한번은 내가 많이 아팠다. 그를 찾아 구비오에 갔다. 공황장애로 혼자서 잘 수 없었다. 봄이었는데도 중부의 산악 도시 구비오는 추웠다. 가스비가 아까워 불도 때지 못하는 추운 자취방에서 그가 저녁밥을 차렸다. 어떻게 만들었는지 김치 한 종지와 달걀프라이가 놓인. 그날 밤 그는 불안 증세를 호소하는 나를 제 침대에 눕혔다. 물을 끓여서 생수병에 담아 건네주었다.
그는 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그는 쉼 없이 깎고 조이고 붙였다. 그가 학생 시절 만든 어느 악기에는 내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뜨거운 물병을 내게 안겨주고 재워준 값으로, 그 막막하던 날을 견디게 해준 그에게 보탠 악기 나무 값이었다. 그런 호의를 기억하는 그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의 바이올린 작품은 거의 팔리지 않는다. 한국의 현악기 사대주의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세계에선 다 아는 일. 한국인이 만든 악기는 아무리 뛰어나도 거래가 뜸하다. 그처럼 손으로만 깎고, 최상품 재료로 만든 고급일수록 국산은 더 외면받는다. 이상한 일이지만 그러하다. 엉터리 외국 악기도 거간이 붙어서 아주 비싼 값에 매매된다.
그는 악기마다 꿋꿋하게 자기 이름을 새겨 넣는다. 배운 학교가 있는 도시 이름 ‘구비오’에 덧붙여서. 최상의 소리를 내는, 과르니에리와 스트라디바리우스식 악기가 그의 제작소에서 세월을 얻어간다. 그는 잘 팔리지 않는 악기를 끊임없이 만든다.
그는 여전히 잘 산다. 공공근로 나가서 몇 푼 얻고, 시간 내어 농사도 짓는다. 한번은 그가 직접 농사지은 단호박이 집에 왔다. 식구들은 달고 맛있다는데 나는 손이 가지 않았다. 내가 그를 생각할 때마다 기억나는 건 모르타델라 샌드위치다. 그저 제일 싸기 때문에 지겹도록 먹었다는.
2023년 가을. 나는 10년 동안 운영하던 식당을 닫았다. 짐을 정리하는데, 그가 보내준 커다란 원목 도마가 눈에 들었다. 나를 위해 제일 좋은 나무를 다듬어 깎은 커다란 도마. 세계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도마. 나는 가만히 그 도마를 껴안았다. 마에스트로가 된 그를 기억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