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정적인 사람이다. 어쩌면 비관적인 사람이다.
하루의 마지막은 그날의 실수를 떠올리는 것으로 마감을 찍는다. 그게 아니라면 어제. 또 그게 아니면 일주일 전에. 그것조차 아니라면… 하고 10년 전의 내 못난 점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는 종류의 인간이다. 이런 내 성격이 좋은 것이 당연히 아니다. 단지 이러고 살지 않는 방법을 모를 뿐.
솔직히 말하면 가급적 빠르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삶이 아름답다는 것에는 여전히 동의하지만, 거기서조차 티끌을 찾고 있는 나를 보면 정말이지 골이 터질 것 같다.
세상에는 오답을 너무 잘 알기에 정답에 가까워질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매일같이 불행하고 실패하고 슬프고 우울하기에 반대로 어떻게 살아야 그러지 않을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들 말이다. 나는 그게 부정이 가진 힘이라고 믿는다. 부정으로도 긍정을 쌓을 수 있다. 오답을 너무 잘 알면 오히려 정답을 잘 찾아낼 수 있듯.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나는 죽고 싶다 말했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었다. 그저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을 뿐. 부정으로 똘똘 뭉친 내 마음을 부술 긍정을 찾아내기까지 너무 오래 걸렸을 뿐이다. 이른바 합리적 긍정을 말이다.
부정으로도 긍정을 만들 수 있다. 불행하기에 행복이 무엇인지 더 잘 설명할 수 있다. 그러니 나는 이제 스스로를 이렇게 설명하고 싶다.
"나는 부정적인 게 아니야.
합리적으로 긍정적인 사람이지."
그날 밤, 집에 돌아가는 길 술 취한 김에 모처럼 나에게도 답을 요구해봤다. "넌 잘하는 게 뭐야?" 회사라는 간판을 떼고 네가 보여줄 실력이 있어? 경력을 제외하고 네게 남은 실력이 뭐야. 진득이 고민해봤지만, "아뇨." 없는 것 같았다. 없는 답도 만들어서 대답해야 할 판에 속도 좋은 놈이었다. 젊음을 제외하고 내게 남은 무기가 무엇인지, 그날의 나는 정의할 수 없었다.
누구에게나 경력이 아닌 실력으로 말해야 하는 시기가 온다. 어떤 사람은 30대에 찾아올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80대에 찾아올 수도 있지만, 그 시기는 누구에게나 누락 없이 찾아온다. 젊음이라는 말로 애써 덮어왔던 폭력적인 질문과 맞이해야 하는 시기가. 그렇기에 나이가 차오를수록 우리에게 더 필요한 건 "나 어디 나온 사람이야."라는 텅 빈 허세가 아닌, "나 이거 할 줄 아는 사람이야."라는 알찬 증명이다.
매번 어물쩍 지나쳐버린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우린 생각보다 더 오랜 시간 갖고 있어야 한다.
멈춤은 정지가 아닌 충전이라는 당연한 논리를 우린 자주 까먹는다. ‘쉬는 건 나중에 하면 돼. 다 끝내고 그때 가서 편히 쉬면 돼’라고 말하지만 알다시피 인생이란 도통 끝이 나질 않는다.
학교가 끝나면 직장이, 직장이 끝나면 가정이, 가정이 끝나면 육아가, 육아가 끝나면 노후가 우릴 기다리고 있다. 인생이란 뺑뺑이는 놀이터에 있던 것과는 많이 달라 아무리 기다려도 알아서 멈춰주질 않는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에게 조금 더 억척스러운 삶을 요구한다.
그러나 삶이란 고작 5시간 안에 끝나는 42.195킬로미터짜리 마라톤이 아닌 90년짜리 승부기에, 우린 역설적으로 90%로 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적당한 열의로 꾸준히 살아내야 한다.
쉬어야 할 때 쉬지 않으면 정작 뛰어야 할 때 쉬게 된다. 그러니 다 쓰러져가는 나를 위해, 매일같이 지쳐 사는 나를 위해 부디 한 시간에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종을 울려주자. 어린 날의 학교처럼.
지금은 쉬라고.
지금 쉬지 않으면 분명 수업 시간에 졸 거라고.
침대에만 누우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잊고 살던 후회는 눈을 세게 감을수록 더 선명해지고 30분은 자책을 해야 마침표가 찍힌다.
이젠 자고 싶어도 잘 수가 없다. 도대체 뭐가 달라진 것일까. 오랜 시간 고민해봤지만 생각나는 답은 이것 하나밖에 없었다.
서울에 자가를 보유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래보다 능력 있는 직장인이 되고 싶었고 천재는 아니어도 교양만은 넉넉한 30대로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괴로웠다. 오늘은 언제나 부족한 나를 확인하는 과정이었기에 차마 내일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내일은 오늘보다 조금 더 부족해진 내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생각이 많은 사람일수록 오늘을 살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이 하는 생각이란 대부분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이기에 생각이 많을수록 오늘을 떠나보내기가 힘들어진다고. 그런 이유로 많은 전문의들은 숙면을 위해 생각 좀 그만하라고 처방 노래를 부르지만 도통 그 방법만은 알려주지 않는다.
그간 완벽한 해결책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내 불면을 한순간에 날려줄 위대한 생각만 떠올리면 지금의 문제도 다 해결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 생각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건 ‘더 완벽한 생각’이 아닌 ‘감각’이었다. 생각이 과거와 미래에 머무르는 시간이라면 감각은 온전히 현재를 느끼는 시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