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대 혐오 시대다.
누군가를 조롱하고 내려 치는 게 당연해진 사회.
분명 혐오는 돈도 되고 어그로도 잘 끌린다. 그런데 본원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자존감. 그렇다. 지겹지만 또 자존감 얘기다. 다만 조금은 다른.
포털사이트 국어사전에 자존감을 검색하면 이런 뜻이 나온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라는 믿음.’ 풀이에서 알 수 있듯 자존감에서 의외로 중요한 건 남이다.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있냐 없냐는 안타깝게도 타인의 평가를 통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 사회는 타인의 사랑을 받기 위한 난도가 S랭크인 곳이다.
다시 말해 누구든 나를 우쭈쭈 하며 올려줘야 차오르는 것이 자존감의 실제 모습인데, 아무도 그래주지 않으니 답은 한 가지인 것이다. 남을 내려 치는 것.
‘우리 서로를 그냥 좀 내버려두자.’
사람을 미워하는 데도 체력이 든다. 시간도 들고 감정도 들며 때때로 큰돈도 든다. 모두 이득 없이 낭비하기엔 너무도 소중한 가치들이다. 그 가치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우린 서로를 좀 더 내버려둬야 한다. 사랑은 아니어도 "넌 그렇구나" 정도의 건조한 존중은 보내줘야 한다. 또 모른다. 혐오가 혐오를 부르듯 존중이 존중을 불러올지도.
해소되지 않은 기분은 성격이 된다. 작은 짜증으로 시작된 기분은 일상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고 속속들이 헤쳐 모여 결국 더러운 성격으로 완성된다. 어떤 성격으로 살고 싶은지는 빼곡히 적은 새해 다짐이 아니라 일상을 어떻게 다루는지에 달려 있었다.
내일도 내 세상에는 수많은 짜증이 튀어나올 것이다. 날 선 댓글과 혐오 섞인 기사, 그리고 어깨를 툭 치며 새치기를 하는 성격 급한 할머니까지. 내 하루를 망칠 분노는 꼭 그러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 튀어나와 나를 시험할 것이다. 이래도 화를 안 낼 거냐고. 하지만 그건 내 성격이 아니다. 잠깐의 기분이다.
언제든 화가 날 순 있지만, 언제나 화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다. ‘그럴 수 있다’라는 방패 같은 말로 남이 아닌 나의 기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니, 될 것이다. 기분이 성격이 되지 않게.
자기 충족적 예언의 사전적 정의란 이렇다. 특정 상황을 마음속에서 ‘실제’라고 결정해버리면 그에 맞게 내 행동과 생각을 변화시켜 결국 원하는 결과를 이뤄낼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 다시 말해 말이 씨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겸손은 미덕이다. 지나친 자신감은 재수 없음과 동의어고 실패했을 때 실망할 것을 대비해 스스로에게 부단히도 이 말을 세뇌시킨다. "어차피 안 될 거야." 물론 그 말들은 실제로 추락했을 때의 아픔을 덜어주었지만, 안타깝게도 우리의 날개마저 빼앗아갔다.
말에는 분명 힘이 있다.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말은 머리 위의 천장이 되어 우리의 한계를 정의 내리는 굳건한 벽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잘해야 한다. 남에게 잘해야 하는 것만큼이나 나에게도 꼼꼼히, 계산적으로 잘해야 한다.
말 한마디로 모든 게 변하진 않겠지만 말 한마디로 내 마음만은 바꿀 수 있으니까. 포기가 도전이 되고 한계가 가능성이 되고 겸손이 자신감이 될 수도 있으니까.
우리가 스스로에게 해줘야 하는 말 역시 그런 것 아닐까. 지독히도 열심히 달려온 스스로의 허파에 바람 좀 팽팽하게 넣어줘도 괜찮을 것이다.
자신의 노력을 좀 더 믿어보자.
열심히 해온 스스로에게 조금 더 큰 가능성을 쥐여주자.
우린 언제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높이 날 수 있는 사람이다.
창피해서. 무서워서. 인정하기 싫어서.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우린 여전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아프다. 마음이 아픈 사람은 언제나 가장 먼저 아프지 않은 척을 한다. 고통의 크기보다 인증받을 수 없다는 두려움이 우릴 더 아프게 하기 때문이다.
진짜 건강한 사람이란, 튼튼한 인간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아프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 고통이 찾아올 때 가장 먼저 자신에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다.
"더 아프기 전에 얼른 병원부터 가자."
우리 좀 더 자주 아프자. 그리고 빠르게 낫자.
아프지 않기보다는
빠르게 나을 줄 아는 사람이 되자.
언젠가. 언젠가. 언젠가. 할머니는 매번 이 말만 거듭하다 결국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든 아흔일곱 살이 되어버렸다. 짜증이 났다. 너무 늦어버린 내 효도와 그것조차 기다려주지 않은 할머니의 야속한 세월에 화가 나 입을 콱 닫아버렸다. 그 표정이 눈에 밟혀서인지 할머니는 평소답지 않게 긴 말을 이었다.
"얘, 너 늙으면 젤루 억울한 게 뭔지 아냐?" 나는 할머니를 동그랗게 쳐다봤다.
"주름? 아냐. 돈? 그거 좋지. 근데 그것도 아냐. 할미가 젤루 억울한 건 나는 언제 한번 놀아보나 그것만 보고 살았는데, 지랄. 이제 좀 놀아볼라치니 다 늙어버렸다. 야야, 나는 마지막에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인 줄 알았다.
근데 자주 웃는 놈이 좋은 인생이었어.
그러니까 인생 너무 아끼고 살진 말어. 꽃놀이도 꼬박꼬박 댕기고. 이제 보니 웃음이란 것은 미루면 돈처럼 쌓이는 게 아니라 더 사라지더라."
희생은 아름답지만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우린 참고 억누르는 것이 어른스러운 것이라 배워왔지만, 사실 아무도 자신의 자식마저 그런 인생을 살길 바라지는 않는다. 어른이란 자신을 가장 먼저 포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까지 선물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올해는 나를 위해 지갑을 열 것이다. 장바구니 맨 아래로 밀린 소설책 한 권을 살 것이다. 그리고 맨 앞 장에 적을 것이다.
"미루다 보면 잊는 법이야."
나도 조금은 멋들어진 어른이 되고 싶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해본 것이 언제일까. 어릴 때는 했었나. 안 했던 것 같은데. 행복이란 말은 어딘가 쉬워지면 안 될 것 같아 아끼고 또 아꼈다. 즐거움만으로는 부족했다. 짜릿함도 아쉽고 뿌듯함 역시 딱 들어맞지는 않았다. 그야말로 머리에 폭죽이 터지는 순간이 아닌 이상 행복이라는 단어는 감히 쓸 수 없었다. 참아온 세월이 얼만데. 겨우 이 정도가 행복이라니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내 인생은 무미건조했다. 솔직히 꽤 인상적인 순간들도 많았던 것 같은데, 제대로 명명되지 않는 순간들은 조금씩 퇴색되어 그저 그런 기억들로 퉁쳐졌다. 부끄러워하다 보니 무뚝뚝해진 그 옛날의 아버지들처럼 나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히 메말라가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핑크빛이고, 나는 이제 안다.
행복은 선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