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함은 체력에서 나온다. 달달한 사랑이나 찐한 우정도 결국 다 건강해야만 가능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사람에겐 부모도 부부도, 결국은 남이다.
어쩌면 그래서 혼자가 좋다는 사람이 갈수록 많아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혼자만 될 수 있으면 이 모든 귀찮음과 짜증, 쓸모없는 대화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니까. 그러나 알다시피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혼자가 좋다는 말은 사실 ‘잠시 숨 돌릴 시간 좀 줘’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을 뿐, 나는 영원히 혼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그저 내 사람들에게 보내야 할 다정함이란 의무에서 잠시 피신하고 싶었을 뿐이다. 비겁했다.
근육의 크기만큼 다정함의 크기도 커질 것이다. 단단해진 복근과 허벅지는 말랑해진 내 마음도 다시 견고하게 고쳐놓을 것이다.
오늘도 내 세상에는 중요한 게 넘치는데 시간은 없고, 할 건 많았다. 그런 세상에서 나를 가장 먼저 포기하는 것은 어찌 보면 가장 속 편하고 효율적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로봇과는 달라 오로지 효율만으로는 윤택하게 작동하지 않았다.
고장 난 마음은 시간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도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멈춤과 지속. 둘 중 무엇이 더 맞는 일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오래된 유행어처럼 그때그때 다르겠지.
섬세하다는 건 남들보다 서너 배쯤 큰 감정 안테나를 갖고 사는 것과 같다.
타인의 걱정 어린 물음에 이들은 언제나 솜씨 좋게 답한다. "난 괜찮아. :)" 타인의 감정을 대신 책임지는 것이 얼마나 지치는 일인지 잘 알기에 내 감정만큼은 누구에게도 쉽게 넘겨주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의 상처만은 언제나 뒷전이다. 마치 밀린 설거지 중 맨 아래 위치한 그릇처럼 내 마음만은 씻어내지 못한 채 매번 그대로다. 이들이 자주 번아웃되는 이유다.
독일어에는 ‘치타델레(Zitadelle)’라는 말이 있다. 요새 안의 독립된 작은 보루라는 뜻으로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작은 방을 의미한다. 나는 섬세한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치타델레라고 생각한다. 챙겨야 할 것, 챙겨야 할 사람, 챙겨야 할 모든 감정들에서 벗어나 오직 나 자신만이 남겨진 시간과 공간이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돌볼 사람이 아무도 없는 그 고립된 공간 속에서만 남들에게 수도 없이 제공했던 말을 자신에게 돌려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냥 지금처럼 살아라. 그렇게 살되 어떤 감정조차 책임질 수 없을 만큼 힘든 날, 마음속이 온통 타인의 감정으로 가득해 당장이라도 터져버릴 것 같은 그런 날. 부러 나밖에 없는 공간으로 도망가자.
그래서 뭘 해도 덤덤하다. 대학이든 회사든 업무든 결혼이든. 심지어 올림픽 금메달이든. 그게 무엇이 되었든 간에 해내는 게 당연한 것이 되었다. 기쁘기보단 안도감이 더 먼저 찾아왔다. 슬픈 일이었다.
세상일이란 게 축하를 받으면 작은 일도 기쁜 일이 된다. 반대로 축하받지 못하면 대단한 일도 당연한 일이 되고.
그래서 우린 서로의 성공에 좀 더 자주 축하할 줄 아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 비록 진심으로 우러나진 않더라도 소중한 사람에게만큼은 큰 박수를 보낼 줄도 알아야 한다. 축하라는 건 꼭 마라톤 결승라인과 같아서 축하받지 못한 레이스는 결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있다는 건 실화였다. 적어도 내 인생에서만큼은. 다만 이 한 가지 의문만큼은 끝끝내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행복이 얼만데?’
행복에도 가격표가 필요하다. 막연히 로또 1등 한 장 값은 있어야지라는 상상은 너무 폭력적이지 않은가. 그럼 나는 평생 행복할 수 없을 것이다. 행복을 구매하기 위해서라도 내겐 좀 더 현실적인 숫자가 필요했다.
행복에는 꿈이 없어야 한다. 목표도 필요 없고 다짐도 과하다. 정말로 행복하기 위해서 우린 한 달에 한 번쯤 공과금 액수를 묻듯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2025년 1월, 이번 달의 행복 값은 얼마지?"
얼마가 나올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행복은 돈으로 살 수 있다. 그것도 생각보다 싸게.
행복은 미루고 미룰 만큼 비싸지 않았다.
소년의 인생은 즐겁다. 청년의 인생은 힘겹고 아빠의 인생은 무겁다. 내 인생이 제일 힘겹다고 생각한 시절을 지나 누군가의 아빠가 되려 하는 지금, 우리 아빠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 나는 새삼 다시 알게 되었다.
인생은 버티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다는 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시간 아까우니 일단은 또 앞으로 걷는다. 힘들다는 느낌은 남아 있다. 피곤하다는 생각도 있고, 조금이지만 그만두고 싶다는 감각도 있다.
인생의 의미를 잃어도, 누군가의 성공에 까무룩 자존감이 무너져도 꿋꿋이 일어나 제자리로 향하는 너를 응원해.
도망치지 않는 것도 능력이야.
빌어먹을 인생에 정직하게 부딪히는 너도, 충분히 대단한 사람이야."
앞으로도 성공보다는 실패가 더 많은 인생을 살 것이다. 백이면 백,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순간은 알람처럼 엄습할 것이고 내가 좋아지는 순간은 휴일처럼 짧고 간헐적일 것이다. 그래도, 그래도. 그 수많은 실패 앞에서 스스로를 꾸짖기만 하는 사람이 되진 않을 것이다.
수많은 팬이 있는 사람은 못 되어도
나라는 편을 가진 사람은 될 것이다.
성공하는 삶 이전에 실패해도 괜찮은 삶을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