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막내 외삼촌은 집안의 온갖 미움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하나는 들을 수는 있으나 늘 어설퍼 외할아버지의 호통과 마주서야 했다. 또 하나는 두 귀 모두 들리지 않으니 하릴없이 고스란히 바보 취급을 당하며 클 수밖에 없었다. 외할머니는 본인 배 속에서 낳은 두 남매가 가엾고 또 가여워 매일 밤 그들을 품은 채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냈다.
엄마와 막내 외삼촌은 얼마 되지 않은 시린 삶의 무게가 버거워 흙냄새가 나는 따스한 그 품에서 오래도록 머물 수 있기를 바랐다.
엄마는 늘 당신 귀에서 냄새가 난다고 느꼈고 그래서 사람들 앞에 당당히 나설 수가 없었다. 엄마는 자신감이 없고 수줍었다. 놀림을 받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귀가 아파서 고통받는 건 엄마였고, 엄마의 귀가 그렇게 된 건 엄마 탓이 아니었다. 하지만 엄마는 모두가 스스로의 탓이라 생각했다. 남의 탓을 하기에 엄마는 너무 착했고 사회는 여성의 장애에 관심이 없었다.
외할아버지의 고함은 그칠 날이 없었고, 엄마의 가슴속엔 매일 시퍼런 멍이 들었다. 그러나 몰려오는 하루를 내칠 방법이, 엄마에겐 없었다.
"정철아. 너는 이 집에 남지 말고 떠나. 가능하다면 그러는 게 좋겠어."
엄마는 자신도 모르게 막내 외삼촌에게 그런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막내 외삼촌이 떠나던 날 짐가방을 챙기면서 엄마는 참 많이 울었다. 엄마에게 막내 외삼촌은 늘 걱정되는 애틋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연고도 없는 타지에 보내야 한다니…. 이제 무슨 일이 있어도 막내를 지켜주기는 힘들 거란 생각에 엄마는 가슴을 쳤다.
만일 막내 외삼촌이 그곳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면, 엄마는 집을 떠나라고 소리치던 과거를 발기발기 찢어버리고 싶을 터였다.
막내 외삼촌이 떠나자 엄마는 마음 둘 곳이 없었다. 몸 한가운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그 숭숭한 구멍 사이로 시종 바람이 불어 잠자리에 들 때마다 가슴이 쓰렸다.
‘빨리 이 집을 떠나야 해. 그런데 어떻게 하면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엄마는 매일 밤 발로 이불 끝을 비비적거리며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집에서 엄마는 사람이 아니었다. 소였다. 아니, 어쩌면 소보다 못한 존재였다. 소야 나중에 팔면 한 밑천이지만, 엄마는 결혼해서 이 집을 나가면 출가외인으로 취급받을 거였다. 그걸 아는 외할머니도 한쪽에서 소리 없는 울음을 울었다. 엄마는 첫 번째 남자친구를 그 이후로 다신 만날 수가 없었다. 멍이 빠지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엄마가 남자에게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날 만나러 오면 나는 그날로 죽게 되니 다신 찾아오지 마세요. 나는 참 바보 같지만 앞으로도 지금처럼 바보같이 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정말 고마웠고 다만 미안해요.
외할머니는 매일 밤 구석에서 숨죽여 흐느끼는 엄마가 가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외할아버지가 외출하고 없을 때에 외할머니는 엄마가 좋아하는 반찬을 잔뜩 차려놓고 엄마에게 밥을 먹였다.
그러던 어느 날 외할아버지가 며칠 친척집에 머물다 돌아오겠다고 했을 때 외할머니는 옳다구나 싶었다.
엄마는 형제도 많지 않고 장남도 아닌 남자에게 시집가고 싶었다. 외동도 싫었다. 외동은 버릇없고 자기밖에 모른다, 는 어른들의 말보다 집안의 단 한 명뿐인 아들에게 쏟아질 기대가 엄마에게 전이될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이게 엄마의 결혼관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바라는 몇 안되는 이 조건을 충족시키는 남자들이 많지 않았다. 엄마는 여전히 땡볕에서 농사를 짓고 소에 여물을 주고 부모를 위한 밥을 준비하고 때때로 외할아버지의 호통과 마주하며 소일했을 뿐이다.
비록 장남이었으나 남자는 엄마가 아는 남자들 중 가장 형제가 적었다.
엄마, 아빠의 결혼사진 속에는 술을 마시고 와서 얼굴이 붉은 아빠와 술 냄새가 싫어 이맛살을 찌푸린 엄마와 엄마의 배 속에 숨 쉬고 있던 아이, 이렇게 세 명이 함께 찍혀 있었다.
결혼 후 엄마의 삶엔 많은 변화가 있었다. 농사일에서 해방된 엄마는 결혼식을 올리고 3개월 뒤에 출산을 하자마자 성게 까는 일을 시작했다. 아빠가 일을 하러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빠는 대부분의 시간을 친구들과 술을 마시거나 도박을 하는 데 썼다. 젊은 시절의 아빠는 전형적인 한량이었다. 집에 들어오는 날보다 들어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아서 엄마는 아빠의 얼굴마저 잊을 정도였다. 아니, 사실 엄마는 아빠의 얼굴을 잊고 싶었을지도 모른다다. 미치도록 잊고 싶은데도 아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아니,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 말에 따르면, 때때로 집에 들아오는 날 아빠는 술에 취해 엄마를 욕보이기 일쑤였다고 한다. 엄마가 거부하면 그때부터 매질이 시작됐다. 그 시절의 바닷가마을 남자들은 다 그랬다고 아빠를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아빠는 아마 본인을 변호하고 싶을 테지만, 첨예한 사안에선 늘 엄마, 아빠의 이야기가 달랐다).
아빠는 피임도 하지 않았다. 엄마는 아빠를 닮은 사내아이가 태어날까 두려워 관계를 가지는 쪽보다 맞는 쪽을 택했다. 아빠의 아이는 한 명으로 족했으니까.
그럼에도 엄마는 도망치지 못했다. 어쩌면 엄마는 자신도 모르는 새 아빠에게 지배당하고 휘둘리고 있었을 거다. 아빠의 폭력은 싫었지만 아빠의 경제력은 필요했으니까. 아빠가 하는 잠수부 일은 목숨을 담보한 험한 일이라 설사 일하는 날이 며칠 되지 않더라도 아빠가 엄마보다 훨씬 많은 돈을 집에 가져다줄 수 있었다.
수십 회, 수천 회 죽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그때의 엄마는 죽을 수가 없었다. 언감생심 아빠를 죽일 생각은 아예 하지조차 못했다. 그래도 엄마의 하나밖에 없는 아이, 그 아이의 아버지였다.
엄마는 아이를 두고 도망칠 수도, 죽을 수도, 남편을 죽일 수도 없었다. 경제력이 없었기에 혼자 아이와 함께 살아갈 자신도 없었다. 친정으로 돌아가 다시 농사일을 지으며 살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손가락질할 아버지와 친척들, 동네 사람들이 무서웠다.
엄마는 아빠의 결핍이 자신을 집어삼켜버렸다는 걸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린 뒤였다. 엄마는 온전히 뿌리 내리기를 원했지만, 아빠는 애당초 뿌리란 게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뿌리 대신 두려움을 가지고 태어났다. 언제나 불안이 아빠를 잠식해 집안 분위기는 금이 간 휴대폰 액정처럼 위태로웠다. 숨만 쉰 채 두고 보더라도 언젠가 액정은 깨지고 엄마는 그렇게 아빠에게 얻어터질 것이었다. 뿌리 없는 자의 불안이 잉태한 것은 결국 폭력이었기 때문이다.
엄마의 우울은 커져갔고 원을 그리듯 퍼져갔다. 엄마는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면 칠수록 자신은 삶의 진창 한가운데로 더 깊이 빠져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엄마에겐 답이 없었고 답이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계속 생을 이어가야 한다는 게 길고 무거운 사슬처럼 느껴졌다. 엄마는 삶을 살아가고 싶었지만 자신의 삶은 오로지 생존 그 자체로 점철돼 있을 뿐임을, 어느 새벽 짙은 푸름 속에서 깨닫고야 말았다.
독처럼 자라나는 우울 속에서도 엄마는 끊임없이 살아냈다. 별 같은 엄마의 아이가 유일한 버팀목이었다.
삶이라는 무서운 경기에 내던져진 엄마는 자신의 아이 또한 이 불안의 링에서 살게 해야 한다는 게 죄스러웠지만, 꼬물꼬물한 아이의 손을 잡을 때마다 이 아이만이 엄마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걸, 그래서 아이의 손을 놓으면 안 된다는 걸, 아니, 자신은 이 아이의 작은 손을 놓을 수 없다는 걸, 아이의 손을 잡고 있으면 아주 어쩌면 팽팽 도는 이 세상의 팽이를 멈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최 여사! 밤이 어두워도 다음 날에는 늘 아름다운 해가 뜨는 거 알죠?" 라고 말해주던 아이의 희망찬 입술을 믿었기에 자신이 살면서 유일하게 잘한 일은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은 것이고,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가장 최악의 일도 이 아이를 세상에 내어 보인 것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여자, 그러니까 우리 엄마의 자궁으로 다시 돌아가 마치 영화 <나비효과>의 감독판 엔딩처럼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때때로 나 하나만을 믿고 누군가는 때리고 누군가는 얻어맞는 세상을 살아가는 엄마의 믿음과 희망을 짓밟아버리고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게 역시 엄마가 구원이었기에, 언젠가 내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그래서 사람들이 다 나를 욕하고 발로 걷어찰 때에도 엄마만은 내 피난처가 되어줄 것을 믿었으므로.
어떤 한 사람에게는 다른 한 사람의 손이, 그 손이 아무리 작고 거칠더라도 어두운 숲속 가시덤불을 잘라낼 수 있는 칼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에, 잃어버린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기로 했다. 정절이고 얌전함이고 다 벗어버리고 애초의 곧고 맑음 그대로인 이름, ‘정숙’을….
답이 없는 삶이 답인 생을 살아가고 있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고 이름을 불러주길 바라면서.
"정숙 씨!"
내가 부르면 엄마는 잘 들리지 않으면서도 들리는 척을 하며 희미하게 웃는다. 그 웃음이 엄마의 이름을 계속 부르게 했다. 엄마의 이야기를 쓰게 했다.
"정숙 씨, 정숙 씨, 정숙 씨…."
세상에서 가장 곧고 맑은 사람, 이 세상에 꼭 한 명쯤 있어야 할 사람, 정숙 씨가 웃는다.
언 땅 위에서 꽃이 피어나듯, 아프게.
죽음은 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생의 우울과 폭력, 나이 듦과 병듦, 장애와 학대, 냉대와 모멸, 지척에 있는 죽음과 그 죽음으로부터 해방되지 못하는 남겨진 이들의 삶, 그리고 누군가의 딸이자 누이이자 아내이자 엄마이자 여성이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존재 그 자체인, 우리 곁의 가장 소중한 누군가를….
글을 쓰는 동안 많은 이들의 위로와 격려를 받았다. 그중 한 분은 엄마가 남겨놓은 사랑이 있으니 곁에 없어도 늘 함께하는 거라는 이야길 해 주셨다. 나와 동생의 엄마였고, 아빠의 아내였고, 이모들과 외삼촌들의 누이였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막내딸이었던 최 여사, 정숙 씨.
엄마는 죽었지만 영원히 살 것이다.
이제 이 책을 읽는 여러분이 당신들의 엄마에 대해 기록할 차례다.
나의 엄마는 떠났다. 늘 가구처럼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의 죽음은 충분히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생텍쥐페리의 표현대로라면 두 번째로 탯줄이 끊어진 셈이었다. 두 번째로 매듭이 풀어진 것이다. 한 세대와 다음 세대를 잇는 매듭 말이다.
엄마가 없는 나는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건 정말이지 어려운 일이었다. 엄마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건 온 세계를 다시 배우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돌아보면 세상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하고 자상하게 보살핀다고 생각했지만 그 기저에 깔려 있던 건 애거사 크리스티의 말마따나 ‘다정한 무심함’이었던 것 같다. 나는 딱 적당한 온기로 엄마를 대했던 것이다.
부끄럽게도 엄마가 돌아가시자 슬픔과 함께 해방감도 밀려왔다. 나는 엄마에게 의존하고 있었지만 엄마도 내게 의존하고 있다고 여겼고, 어느 순간부터는 엄마와 ‘긴 병에 효자 없다’며 간병살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엄마와 나, 우리 가족은 죽음도, 삶도 모두 두려웠다. 그러나 엄마에게 있어 아픈 몸으로 사는 것은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엄마가 돌아가신 뒤, 겉으로는 멀쩡하게 웃으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일상을 살았지만 그 누구에게도 제대로 아픔을 표현할 수 없었던 나의 속은 곪고 있었다.
죽은 시간의 더께가 머리 위에 쌓이고 자책의 무게가 어깨 위에 얹어졌다. 그래서일까?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엄마를 만날 수 있었고, 엄마가 있던 꿈에서 헤어 나오면 다시 현실을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외줄 타기를 하는 삶이었지만 그래도 꿈이 있어 매일의 하루를 제정신으로 여밀 수 있었다.
존재 자체가 삶과 죽음이었던 엄마. 엄마는 나에게 삶만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바로 서는 법, 씩씩하게 걷는 법, 편히 눕는 법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피를 돌게 하고 살을 찌우는 음식들을 만들어 먹였고, 사랑스러운 말을, 깊이 있는 지식을 가르쳐 내면을 풍성하게 만들어 주었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나를 환영해준 손길이었다.
엄마의 커다란 따뜻함과 다정함은 32년 동안 나의 세계를 촘촘히 채워주었다. 무엇보다 엄마는 여성으로서 세상에 지배당하지 않고 늘 당당한 나 자신으로 살길 당부했다. 그 말에 힘입어 나는 온전한 나 자신으로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실은 그 빛나는 32년이 엄마의 희생에 빚지고 있었음을,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야 아프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