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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충좌돌

삼촌은 뾰족한 수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엄마의 집안에 뿌리를 깊게 내린 우울의 근원이 무엇일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다들 마음속에 아무도 들여다볼 수 없는 우물을 가지고 있는 듯 보이지만 나는 쉽사리 그들에게 말을 건넬 수 없다.
삼촌은 엄마가 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기억한다고 했다. 바보처럼 착하기만 했던 누나에게 모진 말로 상처를 주었다고 했다. 그게 왜 마지막 대화가 돼야 했던 건지, 모든 것은 삼촌의 탓이라고 했다. 그런 삼촌의 전화를 내가 따뜻하게 받아주는 게 참으로 고맙다고 했다.
‘엄마의 가슴엔 어떤 상처가 새겨졌던 걸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나는 엄마에 대해 얼마큼 알고 있었던 걸까? 내가 모르는 부분은 어디까지일까? 큰외삼촌에게선 계속 전화가 걸려왔지만, 나는 삼촌의 전화를 차마 받을 수가 없었다. 혹시 엄마가 삼촌의 잘못을 요목조목 짚는 나의 모습을 바랐던 건 아니었을지 두려웠다.
엄마처럼 품이 너르지 못한 나는 살아생전 엄마를 괴롭혔던 삼촌이 밉다. 애도의 방법은 각자 다양하겠지만, 애도는 삶의 한 방식으로서 드러난다.
큰외삼촌은 오늘도 엄마를 떠올리며 긴긴 불면의 밤을 후회와 자책과 눈물로 지새울까? 나는 잘 모르겠다. 아직 마음의 키가 다 자라지 못한 내겐 그저 엄마가 필요할 뿐.
분명한 것은 누구나 겪는 사건이더라도 우리 기억 속의 그 사건은 세상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온전한 자신만의 일로 새겨진다는 것이다.
누구나 언젠가 어머니의 죽음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그 죽음이라는 사건은 저마다의 기억 속에서 오롯이 자신만의 일로 새겨질 것이다.
‘엄마의 죽음이 처음이었기에’라는 말로는 끝내 이야기할 수 없는 당황과 혼란과 슬픔이 내 안에 뭉쳐 있었기에 나는 결국 우물우물 하고 싶은 말을 내뱉다 씹어 삼키고 말았다.
그렇게 애쓰지 않는 태도 때문인지 오히려 바라는 것, 원하는 것은 모두 성취하고 가지며 살아왔다. 어쩌면 절실히 원했던 큰 꿈이 없었기에 다 이루며 살아온 건지도 모른다.
그런 내가 샅샅이 나의 역사를 훑었을 때, 간절히 원했던 게 하나 있다. 돌아가시기 직전의 엄마가 일어나시길 간절히 빌었던 것. 돌아가시기 직전의 몸 곳곳에 보라색 울혈(鬱血)이 맺혔던 엄마의 몸을 잊지 못한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나선 꿈에서라도 제발 엄마를 만날 수 있길 역시 간절히 빌었다.
우리 엄마는 살지 못했다. 오래 아팠고 고통받았던 엄마가 그곳에선 더 이상 아프지 않길, 우리와 떨어진 슬픔에 외롭지 않길 바랄 뿐이다. 다만 꿈에서는 난 늘 엄마와 함께다. 엄마가 살아 계셨을 때보다 더 자주 꿈에서 뵙는 듯하다. 심지어는 엄마가 꿈에 등장하지 않아도 꿈을 꾸는 나의 가슴엔 엄마가 늘 함께하는 기분이다. 엄마와 내가 손을 붙잡고 서서 같이 내 꿈을 들여다보는 느낌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엄마.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은 ‘엄마’라는 기억과 추억….
그녀의 자살 시도를 보면서 어쩌면 엄마가 진정한 자유를 원한 건 아닐까 싶었다. 병으로부터, 가족으로부터, 세상으로부터의 자유 말이다. ‘자살’이라는 선택은 삶의 한가운데서 삶의 주인이 되는 방법일 수 있으며 고통까지 기꺼이 사랑할 줄 아는 삶에 대한 완벽한 집중으로서의 방법일 수 있다는 걸, 린저의 소설을 통해 알게 됐다.
고통과 격정에 헌신하지 못하는 사람은 죽을 수도 없다. 죽는다는 것은 마지막 헌신이기 때문이다. 돌아가시기 직전 엄마는 안락사를 원한다고 수없이 말할 정도로 아픈 몸의 고통을 처절히 감내하고 계셨다.
그렇다면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삶을 비켜간, 한 번도 모험을 하지 않은 그래서 아무것도 얻지도 못했고 잃지도 않은 내가 어떻게 엄마와 니나를 이해할 수 있을까?
니나는 생을 너무나 사랑하고 꽉 껴안은 사람만이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생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노여워하지도 못한다. 가만히 있기보다는 차라리 모험을 택해 전부를 기꺼이 잃으려고 하는 자가 진정으로 생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우리 엄마는 너무 최선을 다했기에 쓰러진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엄마가 죽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뭇 생명들이 꺼지고 켜지는 이 세계에서 이런 글을 쓰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껏 나는 다시 생이 주어지는 걸 거부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해오곤 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엄마의 딸로 태어나 엄마와 함께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다시 태어나는 쪽을 택하고 싶다.
영원히 우리 엄마의 딸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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