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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충좌돌

단 한 번도 나의 존재 가치를 대단하게 여겨본 적이 없었다. 감히 이 세상에 태어났기에, 삶을 스스로 선택한 건 아니지만 그럼에도 감히 이곳에 던져졌기에 묵묵히 그 삶을 감내할 뿐이었다.
그건 삶이 내게 준 형벌이었고 나는 온몸으로 그 형벌을 짊어져야만 했다. 내가 결정할 수 없었던 그 일에 대해 원망해본 적도 없었다. 그건 온전히 나의 몫이어야만 했다. 원망하면 할수록 더더욱 형벌의 무게에 짓눌릴 것 같았다.
터널을 지날 땐 숨을 참았다. 언젠가 어릴 적에 터널을 다 지날 때까지 숨을 참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숨을 참고 눈을 감고 터널이 끝나길 기다리며 하염없이 소원을 되뇌었다. 언젠가는 이 터널이 끝날 것을, 끝나고야 말 것을 나는 알았다.
바닥을 치는 자의 기분은 바닥을 치는 자만이 알 수 있다. 그가 아니고선 영영 알 수 없고 누구 하나 알려고 들지도 않을 것이다.
끝없는 밤의 바닥을 밟아 보았다. 그곳은 생각보다 단단했다.
가련한 여인. 엄마의 삶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밤의 택시에서 잘 아는 노래 한 곡이 흘러나왔다. 노래는 스피커에서 흘러나와 투명하게 몸을 감쌌고, 그러자 심장에 자리 잡은 포도덩굴이 사납게 자라고 있음이 느껴졌다.
고통 속에서 나는 마치 물속에 잠겨 있는 아이와도 같았다. 고통 속에서 발버둥 치던 처음과 달리 시간이 시나브로 넘어가면서 고통 속을 유영하게 되었고, 이내 샴쌍둥이처럼 고통과 딱 붙어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태초에 하나였던 것 같은 느낌이 계속되면서 그것은 오히려 분리가 더 어렵게 변해버렸다. 언젠가 내가 사그라들 때 고통 또한 나와 함께 사라져가고 그렇게 나와 함께 묻힐 것을 나는 알았다.
눈을 뜨고 있으면서 자는 척을 하고, 살아 있는 척하면서 죽어 있는 날들 속에서 나는 뛰다가 걷고 걷다가 걸음을 멈추었다. 끝이 없는 굴속으로 하염없이 걸어 들어갈 때에 나는 어린 날의 내 모습을 보았다.
풀리지 않는 수학 문제를 앞에 둔 채 귀를 막고 끙끙대다가 고막을 찢을 듯한 "와장창" 소리에 놀라 뒤돌아봤을 때 발등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채로 엄마를 노려보던 아빠의 붉은 눈, 부러진 코를 감싸며 쓰러지면서 "도망가"라고 외치던 엄마의 까만 동공, 그저 동생의 손을 잡고 현관문을 넘어 달리던 그 어느 날. 유난히도 내가 무서워하던 주인집 할머니의 불도그가 앞길을 막아섰을 땐 차라리 어둠의 진창으로 곤두박질치고 싶던, 하릴없이 동생의 손만 꽉 그러쥐었던 내 모습.
수학은 깨끗이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세상이란 곳은 그렇지 않다는 걸. 이 세상이란 곳은 수학보다도 더 어려운 곳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그날의 기억과 기어코, 마주해야 했다.
나는 두려웠다. 엄마처럼 살게 될까 봐 무서웠다. 때때로 그런 삶을 생각하면 숨이 막혔다.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듯했다. 엄마처럼 살기 싫었고, 아빠 같은 남자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는지 나는 아빠 같은 남자는 절대 만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힘들어 하는 모습을 옆에서 오랫동안 지켜봐 왔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엄마!"
부르다 보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단어. 약을 찾는 엄마의 엉금엉금한 무릎걸음이 떠올랐다. 어떤 병에 걸리면 낫기 위해 그 병에 해당하는 30알 분의 삶을 삼켜야 한다. 삼켜내야 한다. 그마저도 하나의 병의 무게다. 병들의 무게는 엄청나서 엄마는 도저히 다시 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지나간 삶의 스산함은, 늘 가장 최악인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지금보다 낫다는 것이다. 매일 최악의 순간을 감내하지만 지나고 나면 최고의 순간들. 역설의 무게에 질식할 것 같은 순간. 그 순간에 꾸던 꿈속에서 쌀은 눈처럼 떨어졌다. 누런 쌀을 걷어내니 흰쌀들이 나왔다.
어떤 날은 잠에 들자마자 깨어났고, 밤이 되자마자 아침이 됐고, 집에 오자마자 출근을 했다. 빛이 아롱지며 손톱 위에 떨어졌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부터 나는 눈을 내리깔고 걷는 버릇이 생겼다. 기온이 한없이 낮춰져 있었다. 봄이지만 겨울 같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었다. 나는 늘 오한이 든 것처럼 몸이 떨렸다.
여기까지 오는 데 굉장히 오래 걸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생(生)만으로도 버거운데 네 사람의 생이 휘청였다. 각자의 생과 생이 손을 잡을 수 있을까? 아직은 서로 용서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은데…. 이해하기도 쉽지 않지만 이해가 정답이 될 수도 없을 텐데….
손을 잡는다면, 그 생은 조금이라도 단단해질 수 있을까?
6년이 지나 나는 여전히 걷고 있다. 아빠와 엄마와 동생의 손을 잡고 걷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엄마는 연기처럼 사라졌고, 부유하는 공기 속에서 다만 엄마를 느낄 뿐이다. 그래도, 걸어야 할까? 걸어야 한다. 걸을 수밖에 없다. 아직은 걷는 것 외에 무얼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하므로….


여전히 나는 걷고 있다.
병으로 죽은 엄마의 상실 앞에서도 남겨진 가족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데, 하다못해 자살 유가족들은 어떨까? 자살 유가족들은 우울증에 빠지기 쉽다. 특히 다른 사람의 죽음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남’들 때문에 더욱 그렇다.
자살 유가족들은 항상 손가락질에 시달려야 한다. ‘가족이 도대체 어떻게 했기에 또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자살을 했을까?’ ‘그 죽음에 남겨진 가족들은 책임이 없을까?’ 등, 자살 유가족들은 그러한 손가락질 속에서 죄책감을 내면화한다. ‘나 때문일지도 몰라’에서 ‘나 때문이야’로 번지는 건 순식간이다.
우리 가족 역시 아직도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엄마는 왜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을까? 우리에겐 책임이 없을까? 우리가 뭘 잘못했을까? 단 한 번이라도 엄마가 이해받고 있다고 느낀 적이 있었을까?
남겨진 가족들은 오늘도 엄마와의 과거를 뒤져본다. 그 과거는 때로 애틋하고, 때로 따뜻하다. 그럼에도 회상을 멈출 수 없는 건 그렇게 하는 것이 엄마를 추억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모성에 대한 우리 모두의 부채감은 끊임없이 엄마를 반추하게 한다.
한 죽음은 지속적으로 삶을 환기시킨다. 많이 고통스럽더라도 엄마를 그리는 일을 멈출 수 없는 이유다.
상실 이후의 삶보다 더 중요한 건 삶 그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일 테다. 엄마를 잃고 내가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아빠는 매일 엄마 생각을 한다. 어떤 이는 생각하면 가슴 아프니 이제 그만 생각하라 한다. 엄마의 사진도 더 이상 보지 말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엄마를 기억하고 싶다. 우리가 아플 걸 생각해 엄마를 기억하는 걸 그만두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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