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식장 바닥은 딱딱했다. 거듭 뒤척이며 자세를 바꿨다. 끊이지 않고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며 온 가족이 두통약을 몇 개나 집어삼켰는지 모른다. 누워 있으니 굽었던 척추가 확 펴지는 느낌이었으나 잠이 오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며 영정사진 앞에서 웅크려 있는 아빠와 동생을 생각했다.
눈물은 나지 않았다. 한 번쯤 소리 내어 크게 울어보고 싶었지만 곁에 있는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그것은 눈치 보기가 아니었다. 나의 울음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까 조심스러운 두려움이었다.
2018년 5월 25일. 엄마가 돌아가셨다. 주민등록상 생일과 똑같은 월과 일에. 엄마가 중환자실에 입원한 건 며칠 되었지만 직장인이라 휴가를 내기가 여간 눈치 보이는 게 아니었다. 하필이면 마감 기한이라서 더욱 그랬다. 주말에 고향에 내려가기로 하고 일에 집중하는 와중에 급박한 전화가 걸려왔다. 병원에서 엄마가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단다. 그 말을 듣는 와중에도 나는 그리 심각하지 않았다. 마감 걱정이 먼저였다.
나는 못 말리는 일 중독자였고, 내심 우리 엄마는 툭툭 털고 다시 일어날 거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본래 병원이란 곳은 환자에게 필요 이상으로 겁을 주지 않던가’라고 여겼다. 하지만 먼저 언니를 떠나보낸 적이 있는 후배는 심상치 않은 조짐을 느꼈는지 얼른 고향에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수 회, 수십 회 고민하다 결국 다음 날 저녁에 고향으로 떠났다.
다음 날 병원에서 긴박한 전화가 수차례 걸려왔고, 의사는 엄마를 위해 결정을 내려주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금은 약의 힘으로 겨우 버티시는 거라고, 이 상태에서 계속 약을 추가한다면 생명은 연장할 수 있겠지만 그건 살아도 사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아빠는 계속 집에 가고 싶다고 했다.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아빠는 떨고 있었다. 두려웠을 것이다. 사실 우리 전부 그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가족을 대표해 고개를 끄덕였다.
2018년 5월 25일 오전 9시. 엄마가 돌아가셨다.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린 듯 내게 조금이나마 눈 붙일 수 있는 하루를 선물하고, 그렇게 마지막까지 딸을 배려하며 눈을 감으셨다. 약을 계속 투여했으면 어땠을까? 엄마는 내가 죽였다. 그런 거나 다름없다고, 나는 울음을 삼켰다.
장례가 끝나고 우리 가족은 저마다 각자의 방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아빠는 곡기를 끊었고 그러면서 죽음을 생각했고, 동생은 너무 많이 울었고 그러면서 죽음을 생각했고,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엄마의 꿈만을 계속 꾸며 죽음을 생각했다.
우리는 매일매일 죽어가고 있었고, 말을 했든 그렇지 않았든 저마다의 죄책감으로 말라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또한 서로의 곁에 남아 있는 방식으로 힘이 되어 주고 있었다.
나의 고통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사람들은 너무나도 쉽게 시간이 지났으니 이제 내가 고통에서 헤어났으리라 짐작하곤 한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아직도 깊은 터널 속에 있다. 그 터널의 어두움은 터널에 있어 본 이들만이 알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쉽게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상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이들이 무섭다. 나는 이제 다시는 누구의 고통도 섣불리 재단할 수 없을 것 같기 때문이다.
나 역시 다른 방법이 없다. 상실을 먹고 자라난 책들을 그저 쓰다듬고 읽고 그에 대해 토해내는 것 외에는. 죽음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는 사회를 정면으로 마주한 채 애도를 꺼내놓는 것 외에는. 그리하여 충분히 슬퍼하는 것 외에는.
이제 나의 삶은 다시는 이전과는 같지 않으리란 걸 깊게 느낀다. 삶을 대하는 방식 역시 이전과는 절대 같지 않을 테다.
오늘도 나는 어두운 터널 속에서 아무도 피하지 못할 질문을 던진다. 삶과 죽음이 겹쳐진 페이지를 들고.
극심한 병증이 엄마의 온몸을 덮치자 엄마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엄마가 필요 이외의 말을 할 때, 그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고 원래 형태가 뚜렷하지 않던 그녀의 말들은 아예 형체를 잃어버렸다. 꼭 낡은 미래를 읽고 있는 것만 같았다. 누구라도 그런 류의 말들은 좀처럼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 순간이 올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무너져 내리고 말았다. 내가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거대한 젤리들이 내 머리 위로 "쿵" 하고 떨어져 버리고 그것이 이내 작열하는 태양 아래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어찌할 수 없고 손 쓸 새도 없이 나는 불쾌한 슬픔에 젖어 버리곤 했다. 그럼에도 엄마는 이해를 바랐고 여전히 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 매일이었다. 엄마와 나는 각기 다른 밤의 장막 뒤에 숨어 있었다. 우리는 그저 하릴없이 밤을 지새웠다. 그리고 그렇게 밤을 떠나보냈다.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뜬눈으로 새벽을 맞는 건 우리 모녀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다.
내 곁에 누워 함께 눈을 부릅뜬 채 밤을 지새우던 현실 속 엄마는 내가 자란 만큼이나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 올린 상태였다. 피부는 생기를 잃었으며 오랜 불면으로 몸은 더욱 야위었다. 곱던 머리칼은 푸석거리고 세월의 흐름을 거스르지 못한 모발들이 한 움큼씩 빠지기 일쑤였다.
엄마는 매일 더 깊어지는 주름에 어찌할 바 몰랐다. 그런 엄마의 머리통은 아주 조그마했다. 놀라울 정도로 작아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의 봄.
엄마의 여름.
엄마의 가을.
엄마의 겨울.
엄마의 사계절.
엄마에게 들러붙은 시간.
시간의 더께들.
그 혹독하고 진득한 것들을 떠올리다 보면 온몸이 차가워졌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냉동 창고에 막 들어선 사람처럼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때마다 나는 갑자기 나에게로 밀려든 전 생애의 무게에 질식할 것만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는 안됐다. 어쩌면 나의 출생이 엄마의 전 생애의 발목을 걸어 넘어뜨린 건지도 모른다.
1987년 3월 26일, 무표정하게 서 있는 엄마의 결혼사진 속에 자리한, 그로부터 3개월도 채 지나지 않아 태어난 나란 아가는. 그래서 나는 그녀를 웃게 해주고 싶었다. 웃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 더 이상은 용서를 위해 애쓰지 않기로 한다. 나는 엄마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내 노력은 위선이었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나니 비로소 보이는 엄마의 삶이 있다. 그러나 내겐 아이가 없으므로 나는 끝내 엄마로서의 엄마 삶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죽음은 늘 삶의 뒤편에 있고 삶은 언제나 죽음의 양면이다.
그러니 나는 매일매일 아주아주 씩씩하게, 아주아주 훌륭하게 죽어갈 것이다.
엄마는 우울했다. 엄마가 신경정신과를 다니며 치료를 받기 시작한 게 내가 아홉 살 때쯤이었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입원을 고려했을 정도로 치료를 받았으니 엄마의 우울증은 20년 넘게 묵혀온 것이었다. 엄마의 우울에는 아들이 아닌 딸로 태어남으로써 받은 냉대와 장애에 대한 멸시, 시골 여성으로서 당한 노동력 착취와 아내이자 며느리, 엄마로서 받은 폭력이 기저에 도사리고 있었다. 거기에 가난이 디폴트로 얹어져 엄마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사회적으로 최약자의 삶만을 살다 갔다.
엄마는 자존감이 낮았다. 오랜 냉대와 멸시, 모욕들이 엄마를 그리 만들었다. 엄마는 모든 일에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엔 엄마가 정말 잘하는 일임에도 엄마 스스로는 그걸 인정하지 못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있을 리 없잖아’가 보통의 엄마 반응이었다. 엄마가 움츠리고 고개를 숙일 때마다 내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칭찬은 엄마에게 가 닿지 못했다. 진정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단 한 사람만 있어도 우울은 많이 옅어진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이렇게 엄마를 사랑하는데, 외할머니도 엄마를 그리 사랑했다는데, 우리 엄마의 우울이 나날이 짙어만 가는 이유는 뭘까? 매일 밤 고민했다.
엄마의 우울을 머리로만 받아들였다. 어쩌면 나는 엄마가 우울할 수 있음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걸 수도 있다. 엄마인데, 나의 엄마인데, 나를 낳은 사람인데 엄마가 어찌 불안하고 불안정한 존재일 수 있는지, 생생하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 같다. ‘부모란 원래 산처럼 든든하게 자식 뒤에 우뚝 선 존재 아니던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건 대단히 큰 잘못이었고 내가 엄마라는 타자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음을, 엄마의 고통을 전혀 나눠 짊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했다.
모두가 우울한 시대. 이러한 시대를 산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그림자처럼 달라붙은 우울을 안고 살아가던 엄마의 조용한 뒷모습을 그려본다.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진정으로 온기 가득한 손을 내밀고 엄마의 어깨를 마사지하고 싶다. 지금껏 엄마 어깨에 붙은 우울을 떼어 내려고만 했으니 이젠 그 우울을 감싸 안아 뭉치고 싶다.
납골당에는 ‘정숙’이라는 표지판이 있다. 그 표지판을 볼 때마다 나는 코끝이 매워진다. 엄마 이름이다. 표지판을 똑바로 보고 걷다 그 표지판이 등 뒤로 사라지면 매화실이 나온다. 오늘은 누군가 불을 켜 두고 갔다. 고인들께는 어두운 곳이 좋을까, 불빛 환한 곳이 좋을까.
때때로 엄마 생각이 너무 깊어질 때면 주위 사람들에게 립밤을 선물하곤 한다. 엄마가 좋아했던 니베아 벚꽃 립밤은 일본에서만 구할 수 있어서 니베아 라인의 립밤을 따로 챙겼다. 아마 사람들은 내가 왜 그들에게 립밤을 선물하는지 모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엄마를 추억한다. 엄마가 좋아하던 것들을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는 나만의 방식으로….
동해에 온 김에 새파란 어달리 바다가 통째로 보이는 카페에 갔다. 부드러운 카페의 원목 테이블과 히비스커스를 베이스로 뭉근하게 끓인 딸기차의 달짝지근한 상큼함은 어쩐지 좋다. 그러나 아무래도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를 대체할 수 있는 건 엄마 외에 아무것도 없다.
어릴 적의 몇 년은 성인 시절의 몇 년보다 더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 같기도 하다. 엄마는 내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뭐든지 스스로 고르게 했고 그렇게 고른 것은 아무리 형편이 어려워도 꼭 사 주었다. 내 물건을 마음대로 처리한 적도 없어서 모든 결정의 처음부터 끝을 모두 내가 하게 했다.
막내 외삼촌은 여러 가지 부침 속에서도 내가 이렇게 잘 자란 게 신기하다고 했지만 삼촌이 모르는 게 하나 있다. 엄마의 온전한 지지와 양육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지금의 내가 될 수 없었음을….
어쩐지 엄마가 보고 싶은 밤이다.
엄마와 나는 서로를 늘 친구로 여겼다. 엄마는 나랑 다니면 심심할 새가 없다고 했다. 평소에 사람들 앞에서 그다지 말이 없는 나는, 엄마 앞에서라면 종일이라도 종알댈 수 있었다.
우리 엄마와 아빠는 늘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설사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타인을 먼저 배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무지하게 손해를 보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나는 엄마의 말을 들었다.
엄마는 아닌 것에 있어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도 행동으로 보여줬다.
선생님이 아주아주 잘 사는 집 애들만을 예뻐한다는 걸 나는 알았다. 그러나 그런 건 이제 내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내 할 일을 했다. 열심히 공부해서 기말고사에선 전 과목 백점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내게 중요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선 신경 쓰지 않는 법을 배웠다.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지 않았던 나의 유년 시절은 엄마로 인해 풍족하게 채워졌다. 나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친구들은 우리 집이 부자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나는 구김 없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엄마 덕분이었다.
역시 엄마는 영원한 나의 히어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