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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어땠어
  • 시를 잊은 그대에게
  • 정재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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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5-06-15
  • : 16,358
#시를 잊은 그대에게



☆ 가난한 갈대의 사랑노래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 신경림, <갈대> 
 
 
자신을 성찰할 줄 모른다면 비애도 없다.
인간 존재의 모순과 그에 따른 불안, 자신이 인간이라는 이유로 흔들리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인간은 더욱 성숙해질 수 있다. 이 시가 허무와 비애로만 끝나는 것 같지 않은 이유, 이 시를 읽고 나서 잠시만 눈을 감고 음미하노라면 은근히 고개가 끄덕여지며 미소가 번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는 몰랐다˝라는 표현은 결국 ‘이제는 안다‘란 뜻이 되기 때문이다. 허무를 모르는 것도 제대로 된 인생은 아니지만 허무에 일방적으로 패배하는 것 역시 아직은 성숙에 도달한 인생이라고 보기 어렵다.
p.20 
 


☆ 떠나가는 것에 대하여

 
꽃에게 이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다. 꽃은 굳이 맹세하지 않이도, 침 튀어 가며 부르짖지 않아도, 때가 되면 피고 때가 되면 진다. 꽃이 꽃을 피우고 지게 하는 것은 꽃에겐 아주 자연스로운 일이다. 반면에 그 역시 자연인 주제에 인간만은 영 그것이 자연스럽지가 않다. 이런 일에 그는 늘 결심하며 늘 실패한다. 꽃처럼아름답게 살기는커녕 꽃처럼 죽기도 왜 이리 힘이 드는 겐지 인간은 자꾸만 현재를 더 붙잡으려다 자꾸만 추한 꼴을 보이곤한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때는 격정을 인내하지 못한 채 제 스스로 죽음을 앞당겨 세상에 남은 이들을 아프게도 한다. 이해는 간다. 그래서 인간인 게다. 그래서 자연은 인간의 영원한 스승인 게다.
그래, 더 바라진 말자.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대충이라도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p.64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모습을 결코 추하다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구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 흔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
목련을 옹호하고 싶은 사람들은 다음 시를 보라. 
 
 
목련꽃 지는 모습 지저분하다고 말하지 말라
순백의 눈도 녹으면 질척거리는 것을 
지는 모습까지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그대를 향한 사랑의 끝이
피는 꽃처럼 아름답기를 바라는가
지는 동백처럼
일순간에 져버리는 순교를 바라는가
아무래도 그렇게는 돌아서지 못 하겠다.
구름에 달처럼은 가지 말라 청춘이여
돌아보라 사람아
없었으면 더욱 좋았을 기억의 비늘들이
타다 남은 편지처럼 날린대서
미친 사랑의 증거가 저리 남았대서
두려운가
사랑했으므로
사랑해버렸으므로
그대를 향해 뿜었던 분수 같은 열정이
피딱지처럼 엉켜서
상처로 기억되는 그런 사랑일지라도
낫지 않고 싶어라
이대로 한 열흘만이라도 더 앓고 싶어라 
 
 - 복효근, <목련 후기> 
 
 

☆ 눈물은 왜 짠가


공감도 능력이다. 공감은 공명(共鳴)에서 온다. 
공명이란 과학적으로 말하면 어떤 물체의 진동에너지가 다른 물체에 흡수되어 그물체가 진동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원래 진동에너지의 진동수와 진동에너지를 받는 물체의 고유 
진동수가 가까우면 더 큰 공명의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너무 어려운가? 쉽게 말해 공명이란 한자 뜻 그대로 남과 더불어 우는 일이다. 남이 울면 따라 우는 것이다.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로 
커지는 것이 공명인 것이다. 마치 현악기처럼 말이다. 
그소리가 울려 퍼져 음악을 만들듯 우리 사회에도 아름다운 공명이 울려 퍼질 수 있다면 그때 분명 우리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것이다. 슬퍼할 줄 알면 희망이 있다.
p.92 
 
 
남이 울면 따라 우는 것이 공명이다.
남의 고통이 갖는 진동수에
내가 가까이하면 할수록 커지는 것이 공명인 것이다.
슬퍼할 줄 알면 희망이 있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 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 박노해, <다시> 
 
 
모두 한결같이 우리 사회가 썩어다고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한결같이 거기서 예외라고들 하니 우리 사회는 전혀 썩지 않았다는 결론을 얻게 되는 셈이다. 적어도 우리 사회가 
썩었다는 것을 자각하는 한 우리에겐 여전히 희망이 남아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 사람을 보면 절망하게 된다고 하지만 역시 희망은 사람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남을 탓하고 절망하기 전에, 자신을 바로 세우고 희망을 놓치지 않고 부여잡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만이 희망인 것이다. 남에게서 희망을 찾고 남에게서 희망을 기다리는 사람은 절망이다. 우리 각자가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p.96 
 
 
온 세상이 캄캄해 보일 정도로 희망이 사라진 날, 정말이지 지독히 외로운 날, 그런 날일수록 시를 찾고, 노래를 하며, 누가뭐래도 나를 믿어 주는 한 사람을 떠올려 보라. 빛은 실재이고어둠은 결국 현상에 불과한 것. 빛이 없어 어두운 것이지 어두워서 빛이 없는 건 아니기에, 빛이 어둠을 몰아낼 수 있어도 어둠이 빛을몰아낼 수는 없는 것이기에, 우리의 절망과 슬픔은끝내 소망과기쁨에 무릎을 꿇으리니.
p.101 
 
 

☆ 기다리다 죽어도, 죽어도 기다리는


모든 기다림은 결국 시간과 변화의 문제다. 《어린왕자》 여우의말이 기억나는가? 기다림이란 오늘 하루를 다른 날과 다르게 만드는 일이다. 그러니 어제와 늘 같이 오늘을 살면서 내일이 변화되길 기다리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하지만 그보다 더 어리석은 것은 이미 지나간 버스를 기다리는 
것일 테다. 안타까워도 그것이 진실인데, 무서운 것은 과연 그 버스가 지나갔는지 여부를 알 길이 없다는 데 있다. 기다림에 녹이 슨 채, 그러다 우리는 죽을 테고,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가끔 인생은 두렵다.
p.153 
 
 

☆ 한밤중에 눈이 내리네, 소리없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어느 머언 곳의 그리운 소식이기에
이 한밤 소리 없이 흩날리느뇨. 
 
처마 끝에 호롱불 여위어 가며
서글픈 옛 자췬 양 흰 눈이 내려 
 
하이얀 입김 절로 가슴이 메어
마음 허공에 등불을 켜고,
내 홀로 밤 깊어 뜰에 내리면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 
 
희미한 눈발
이는 어느 잃어진 추억의 조각이기에
싸늘한 추회(追悔) 이리 가쁘게 설레이느뇨. 
 
한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
흰 눈은 내려 내려서 쌓여
내 슬픔 그 위에 고이 서리다. 
 
- 김광균, 〈설야> 
 
 
함박눈이 펄펄 날리었다.
어디고 눈을 맞으며 끝없이 걷고 싶어진다. 
 
 
 
☆ 깨끗한 기침, 순수한 가래


논쟁이라고 해서 반드시 거기에 갈등만 있을 리는 없다. ‘너‘로인하여 ‘나‘를 더욱 잘 알게 되고 ‘너를 아는 것은 결국 
‘나‘를 확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에게만 갇힐 때 우리는 아집에 빠지고, 그저 남의 견해에 순응할 때 우리는 
무지에 빠진다. 
논쟁과 대화의 목적은 차이의 제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더 잘 들여다보고 그로부터 우리 자신과 
서로를 더 잘 이해하기위한 데 있다. 요컨대 사이와 차이는 우리를 오히려 관용의 세계로 이끌 것이다. 그리하여 사이와 차이를 들여다보면 볼수록 우리는 어둡던 눈이 떠지는 개안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p.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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