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두고 읽어야지 하고 조금씩 밀려두었다 1일 1권 의지를 불태우면서 빠르게 넘겨 읽었다.
이미 계속해서 생각하고 보던 내용을 재확인하고 부연설명을 보는 느낌이라 더 빠르게 읽혔던 것 같다. 어느 것 하나 암담하지 않은 것이 없고 다시금 대한민국에서 "여성"으로서의 나를 되새김질한다. 계속해서 쓰고, 읽고 쓰자.
코피노 발생의 1차적 원인 제공자는 한국 남성들이다. 즉 이들의 그릇된 성 인식과 함께 부모로서 자녀를 방치하는 비윤리적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코피노 문제는 한국 남성들의 잘못된 성문화와 자녀 부양의 의무를 방치한 결과물이다. 여성을 ‘엔조이(Enjoy)‘ 대상으로 인식하고, 돈으로 매수하여 성관계를 갖더라도 아무런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비윤리적 태도, 피임을 기피하면서도 필리핀 여성과 즐기고 임신에 대한 책임은 방관하는 태도, 필리핀 연인 혹은 동거녀의 임신 사실의 인지 후, 일방적인 연락 두절이나 귀국 등 한국 남성들의 일련의 비도덕적 행태가 코피노 발생의 직접요인이다. (주22)
그리고 이 남자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유학생인 경우가 가장 많다. 그래서 코피노 발생시기는 필리핀에 어학연수 붐이 일어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참으로 ‘특수한 상황‘이 아닌가. 어학연수는 남자 여자 다 가는데, 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넘는 짓거리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하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Ugly Korean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는데, 사실관계가 틀렸다. 앞으론 ‘Ugly Korean Male‘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라이따
그리고 이 남자들은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유학생인 경우가 가장 많다. 그래서 코피노 발생시기는 필리핀에 어학연수 붐이 일어나는 시기와 맞물려 있다. 참으로 ‘특수한 상황‘이 아닌가. 어학연수는 남자 여자 다 가는데, 왜 인간에 대한 예의를 넘는 짓거리는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이 하느냐 이 말이다. 그래서 Ugly Korean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하는데, 사실관계가 틀렸다. 앞으론 ‘Ugly Korean Male‘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공교롭게도 이들은 라이따이한의 책임을 물어야 할 이들과 정확히 한 세대 정도 차이가 난다. 아버지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아들답다. 도대체 ‘한국 남자 일부‘에게는 어떤 피가 흐르고 있단 말인가.
-독재의 물결은 어떻게 개인의 정신을 지배하는가
디 벨레는 영어로는 Wave, 즉 ‘물결‘이라는 뜻이다. 영화 안에서는 학생들이 만든 단체명으로 쓰이지만, 함축적인 의미는 파편화되어 있는 개개인이 하나의 거대한 그리고 괴기한 공동체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이 마치 ‘물결 타듯‘ 자연스레 진행된다는 것이다.
작은 교실 ‘안‘에서의 독재정치, 그리고 이를 지탱하는 집단주의는 이 과정을 통해 완성된다. 사람들은 독재는 옳지 않으며 개인을 괴롭히는 집단주의를 경계해야 한다고 쉽게 말하지만 이 같은 분위기가 파도처럼 요동치기 시작하면 그 누구도 문제를 문제라 말하지 못하게 된다.
- 폭력에 둔감한 것이 진짜 남자인가?
영화 <디 벨레>와 <엑스페리먼트>는 한국 남자들을 더욱 심오하게 이해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들을 ‘진정으로 위하는‘도구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남자들이 (흔히들 말하는 것처럼) 태어날 때부터 ‘그런 존재‘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설사 생물학적인 ‘고유한‘ 특징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존재 이유를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원래의 모습‘이 무엇인들, 그것이 다른 사회 구성원에게 피해를 주는 것이라면 당연히 본능을 억제해야 하고 여기에 성별 변수가 예외적 조항이 될 수 없다. 남자와 여자가 태초부터 구분되는 것은 생식기의 차이 그리고 남자가 여자에 비해 물리력이 강할 확률이 높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이 태초의 차이를 태초 이후의 차이로 확장하여, 모름지기 남자라면 다 그런것이라고 당당하게 외칠 수 있는 것은 한국에서 더 유별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 남자들이 신의 특별한 선택을 받은 것도 아닐 것인데, 원래부터 유전자가 ‘그딴 식으로‘ 만들어졌을 리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어떤 ‘외부 조건‘들을 경험하면서 ‘물결치듯이‘ 남자에서 남성으로 변한 걸까? 사람마다 약간은 다르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남자들은 ‘폭력을 참아가면서‘. ‘수치심을 느끼면서‘ 남성이 되어간다. 그래서 한국에서 말하는 ‘진짜 남자‘는 폭력에 둔감하다. 둔감하다는 것은 쌍방향이다. 폭력을 당해도 당하는 줄 모르고, 저질러도 그게 자꾸만 폭력이 아니라한다.
-자본가가 부려먹기에 최적화된 노동력
한국의 남자들은 ‘자본주의 노동 세계‘에 본격적으로 발을 딛기도 전에 학교와 군대에서 이미 자본가가 ‘부려먹기에‘ 최적화된다는 말이다. 즉 한국의 남자는 어떤 사회에나 있는 남자와는 ‘다른‘남자다. 그러니 ‘원래‘그런 남자는 없다.
대개의 경우에는 ‘쓸데없이 당당한 남자들 때문에‘ 화를 입는 건 여자들이다. 그렇기 떄문에 "한쪽은 폭력을 피하도록 길러지고 다른 한쪽은 폭력이 폭력인줄 모르게 길러진다."(주24) 오죽했으면 자동차 ‘블랙박스‘ 광고에서 "남자들이 자기가 잘못해놓고도 다짜고짜 소리 지르는 경우 보셨죠? 그래서 여성 운전자들에게는 이런 카메라가 필수죠"와 같은 멘트가 등장할까.
"사회학 공부한다는 사람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뭐 어쨌다는 거죠? 초등학교 여교사가 신붓감 1순위니까 여자는 뭐 사회적으로 혜택이라도 받고 있다는 말인가요? 그게 바로 고질적인 한국의 문제잖아요. 한국에서 남자들이 얼마나 지배적으로 여자의 노동을 규제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설문 조사와 그 결과를 마치 합리적인 것마냥 소개를 하면 어떡해요? 이건 뭐, 직장에서 여자들보고 회식 끝까지 안 남았다고 뭐라고 그러다가 또 그런 여자를 죽어도 ‘아내‘로 맞이할 수 없다면서 뒤통수치는 남자랑 마찬가지잖아요."
-취향 속에 숨어 있는 권력의 메커니즘
남자만의 ‘벌이‘로 가족의 생계가 안정적일 수 없는 시대가 오면서 ‘맞벌이‘는 시대적 흐름이 되었다. 남자들은 ‘아내가 돈도 벌어주길‘원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도‘다. 즉 원래의 일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단서가 있다. 일을 한다는 핑계(?)로 ‘집안일‘을 소홀히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이는 육아 등은 물론이고 ‘남자가 늦은 저녁에 퇴근해서 왔을 때‘ 뚝배기에서 된장찌개가 뽀글뽀글 끓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출근 하기 전에 ‘반드시‘ 밥을 먹어야 하는데, ‘국‘이 빠져서는 안 되는 것도 당연하다. 이런 남자, 아내가 될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너 결혼하면 집에 일찍 들어올 거지? 난 회식한다고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다니는 꼴은 못 봐."
조주은 『페미니스트라는 낙인』
남자들이 초등학교 여교사를 배우자로 선호하는 것에는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여교사는 남성들에게 흔들리는 남성 가장의 정체성을 보완해주면서 집안일, 보살핌 노동까지 담당할거라는 기대 떄문에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을 수 없다."(162p)면서 이것은 "결혼으로 구성되는 가족 안에서 여성들의 노동력을 안팎으로 착취하며 남성 권위를 유지시키고자 하는 의도"(161p)라고 지적한다.
‘개저씨‘들이 아무리 많다 한들, 하루가 멀다하고 여성을 살해, 폭행하는 남성이 뉴스에 등장한들, 불균형한 젠더 권력 속에서 이것은 ‘비난받아 마땅한 남성들의 속성‘으로 잡히지 않는다. (주26)
강인규 교수는 『망가뜨린 것 모른척한 것 바꿔야 할 것: 한국 사회의 변화를 갈망하는 당신에게』에서 이것을 ‘김 여서 조롱 하는 비겁한 사회‘(81~83p)라 일갈한다. 교통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의 성별에 따라 언론의 보도 형태는 완전히 다르다. 운전자가 여성일 경우, "현금 수송차 들이받은 ‘김 여사‘, 가만히 있는 차를 왜?"라는 제목으로 보도가 되며, 기사 내용에도 ‘운전자는 50대 여성이었습니다.‘라는 식으로 운전자 성별을 포함시킨다. 하지만 운전자가 남성인 경우는 다르다. "일가족 참변, 가해 운전자 ‘만취‘"라는 기사에는 운전자 성별이 언급되지 않는다. 내용에도 ‘가해 차량의 운전자는 만취상태였습니다‘라고 밝혀 이 사고가 ‘성별‘떄문이 아니라 ‘술‘ 때문이라는 느낌이 들게 명시한다. 이런 차별적 보도는 ‘여성 운전자는 운전이 미숙하다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나아가 ‘그러니 욕먹어도 된다‘는 차별을 이끌어낸다.
도로에서 차량 간 아주 사소한 위험이 발생하면 ‘자신의 차를 상대 차의 옆으로 바짝 붙여서 창문을 내린 후 상대가 여자임을 확인하고 욕을 내뱉는‘ 사람은 전부 남자다. 신기하지 않은가. 여기에는 명백한 패턴이 있다. 여자가 객관적으로 운전을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운전대만 잡으면 이상한 사람이 된다는 분명한 패턴. ‘이유는 간단하다. 여자가 만만하기 때문이다.‘
" 제가 그 남자 선배에게 주목한 이유는 요리를 하면서 주변에서 자꾸만 자상하니 어쩌니 그러자, 선배가 "나는 힘든 거 내색을 절대 안해"라고 말하는 모습이 의아했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선배의 모습이 마치 ‘내가 안 해도 될 일을 지금 하고 있는 거 알지?‘라고 굉장히 생색을 내는 느낌이었거든요. 여자들은 객관적으로 생색을 낼 상황이라도 내색을 하지 않는게 바로 ‘요리‘라는 노동인데, 남자들은 그 노동을 ‘아주 잠시 보여줘도‘ 상징적인 가치를 다 가져가니 신기한 일이죠."
남자들 입장에서는 기껏 ‘도와줬는데‘ 너무 가혹한 평가 아니냐고 따질 수도 있지만, 부자들의 적선으로 불평등이 사라지지 않고 정치인들의 ‘쇼‘로 사회적 약자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 어찌 ‘행동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는가. 가정적인 남자가 자주 출몰(?)은 하고 있지만, 왜 남녀 불평등에 관한 이 사회의 나쁜 지표들은 늘 지지부진한가. 이런 상황에서 남녀가 ‘함께해야 하는걸‘, 그저 ‘도와주었다는 것‘만으로 남자들은 ‘자상하다‘는 평가마저 받으려고 하니 이 심보야말로 ‘불평등‘의 단면 아니겠는가. 그러니 ‘티 나게‘ 요리하는 남자들을 경계하길.
"그렇게 옷을 입는 건 마치 개 앞에 스테이크를 내놓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뭘 기대했어?"라면서 ‘노출이 심한 옷‘을 입은 여자에게 책임을 묻자 땅콩버터 통 앞에서 얌전히 앉아있는 개 사진을 SNS에 올린 이는 이렇게 설명한다. "땅콩버터는 우리 개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사진 속 우리 개가 땅콩버터를 건드리지 않는지 알아? 내가 "안돼"라고 말했기 때문이지."
통쾌하고 씁쓸하다. 통쾌한 이유는 말 그대로 ‘논리가 아닌 것‘을 가장 ‘논리적으로‘ 설명했기 때문이고 씁쓸한 이유는 이 간단한 상식이 유독 ‘한국에서‘, 그리고 ‘남자들에게‘는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개도 어떻게 훈련받았는지에 따라 평소에 환장하는 ‘뼈다귀‘앞에서도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데,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의 남자들은 무엇을 배웠단 말인가? 교육을 제대로 안 받아서 그런 것인가, 아니면 교육 내용에 충실해서 그런 것인가? 지하철은 그 안에서 무슨 짓을 하면 안되는지 정도는 알고 있는 사람들만이 이용하는 공간임이 자명하다.
그런데 여자들은 이 민주주의가 샘솟는 정보화 사회에서 훨씬 ‘더‘ 조심해야 한다. 말 그대로 과거 같았으면 ‘한 번쯤 혼나고 정신 차리면 될 일‘정도를 저질러도 ‘다시는 이 사회에 발을 못 붙일 정도까지‘ 융단폭격을 당할 수 있기 떄문이다. 전문용어로 하면 ‘마녀사냥‘이다. 신상이 까발려지고 온갖 음해가 난무해지는 속도와 정도가 워낙 커서 나중에는 ‘잘못하는 사람‘을 탓하는 것 자체가 어색해진다. 대한민국 남자들을 다 잡아들일 수는 없기 떄문이다. ‘○○녀‘라고 이름붙여진 사건들의 대부분은 이러하다. 곤히 잠든 여자의 허벅지를 더듬는 것에 비하면 ‘키 작은 남자는 루저‘라고 자기 취향을 말하는 건 그저 "거 참 되게 얄궂게 말하네"정도로 욕 좀 들어먹으면 되는 일이다.온갖 공공장소에서 고주망태가 되어 주정을 일삼고 위액과 섞인 악취 풀풀 나는 음식물 쓰레기를 배출시키는 남자들에 비해 자기 애완견이 ‘지하철 안에서 똥 싼 걸‘ 치우지 않은 여자는 경범죄로 가볍게 처리하면 될 뿐이다. 하지만 남자들은 불특정 다수를 뜻하는 ‘술 취한 사람‘정도로 취급받는 것에 비해 여자는 ‘○○녀‘가 되어 ‘그 이상의‘ 대가를 치른다.
흉악범의 얼굴을 공개하면서도 ‘부연 설명‘을 하는데 ‘남자들이 듣기에 기분 나쁨직한‘ 자기 취향 좀 말했다고, 또 공중도덕 하나 못 지켰다고 해서 ‘개인의 모든 것이 탈탈 털리는‘ 대상이 대부분 여자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것은 ‘인권‘이라는 개념이 성별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고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포털사이트에는 ‘만취한 여교사, 성폭행 당해‘와 같은 뉴스가 등장한다. 많은 이들이 ‘여자가, 그것도 여교사가 만취한 상태였다‘는 측면만을 기억할 것이다.
술 마시고 강간하는 나쁜 남자 덕택에, 술만 먹으면 섹스를 강요하는 자신은 별문제가 안 된다. 술 마시고 애인을 살해하는 남자 덕택에, 술만 먹으면 무엇인가 집어 던져버리며 욕설을 퍼붓는 자신은 별문제가 안 된다. 결국 남자들은 ‘나는 그 정도는 아니다‘라면서 일상에서 무의식적으로 저지르는 유,무형의 폭력을 계속 유지한다. 그래서 ‘괴물까지는 아닌‘ 자신이 좋은 남자라고 착각한다. 이런 남자에게 집안일은 함께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가 ‘도와주는‘봉사의 영역이다. 봉사는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라고 했던가. 그래서 ‘쓰레기 분리수거‘라도 한 번 하는걸 집안일을 ‘해주는‘걸로 이해하고 "나 정도면 괜찮지 않아? 당신은 좋겠다. 내가 가부장적인 남편이 아니라서 얼마나 대박이야?"라면서 스스로를 칭찬하고 아내에게 기쁨의 감정을 강요한다. 그 기세등등한 자신감에 눌려 여자들은 복남이가 되어 살아간다.
"어떤 엄마도 처음부터 아기를 능숙하게 돌볼 줄은 모릅니다. 아빠나 엄마 모두 똑같은 출발선에서부터 아기를 돌보는 일을 시작하는데, 차이가 있다면, 엄마는 하루 종일 아기 곁에 붙어서 어떻게든 해내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는 것이고 아빠는 직장에 나간다는 이유로 가끔 아기를 돌보는 정도의 봉사만 있지 그 책임과 의무에서 비켜서 있습니다. 제 주변에 있는 아빠들 중 어느 누구도 한밤중에 아기가 울며 보챈다고 엄마보다 먼저 일어나서 아기를 토닥이고 젖병을 물리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직장 노동과 가사 노동을 마친 누구나 재충전을 해야 할 시간이지만 그때의 노동은 아내에게 전가되어 있죠. 하지만, 이 차이는 엄마가 직장에 나가도 다르지 않더군요. 아기가 울 떄 죽은 척하는 남편은 그나마 양반이죠. 좀 조용히 시키라고 짜증 내기도 합니다.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는 것은 같아도요."(주31)
사회의 포악스러움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것을 외면한 채, 여자들 기에 눌려 산다면서 자신들의 ‘심리적 거세‘만을 말하기 바쁜 지금의 아버지들을 보고 아들들은 이상한 걸 배운다. 이들은 아버지가 할아버지만큼 화려하게 살지 못하는 ‘사실‘을 보고 지금의 세상이 여자들에게 훨씬 유리하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래서 ‘여성 할당제‘, ‘여성 전용‘같은 말이 나오면 "요즘 세상에 누가 차별을 받는다고 그래?"라며 역차별을 운운한다. 이들은 가뭄에 난 콩이랏 주목받는 ‘매맞는 남편‘, ‘여자 상사에게 성희롱 당한 남자‘사례를 잘도 기억했다가 데이트폭력 피해자의 절대 다수가 여자라는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는 분명한 사회 현상을 애써 외면한다. 그래서 남녀간 벌어지는 폭력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하면 유난떤다고 비판한다. 이런 태도야말로 좋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망각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