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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자책] 가끔은 격하게 외로워야 한다
  • 김정운 글.그림
  • 15,840원 (790)
  • 2015-12-23
  • : 704
여자는 남자를 위해 화장하지 않는다. 여자에게 화장은 연기자의 분장과 마찬가지다. 주어진 사회적 맥락에 맞춰 화장의 톤을 결정하고, 입을 옷에 따라 색조를 결정한다. 남자는 그 맥락에 포함되는 작은 요소 하나에 불과하다. 화장대 앞의 여자는 무대 위의 연기자처럼 끊임없이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대해 생각한다.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자아에 대한 성찰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서정주 시인이 노래한 "거울 앞에 선 내 누님"처럼 여자의 '맥락적 사고'는 시간이 흐를수록 확장된다. 그래서 나이 들수록 여자가 남자보다 훨씬 건강하고 현명하며 지혜롭다. 화장을 지우며 자신의 다양한 역할을 성찰할 수 있는 무대 뒤의 화장대가 있기 때문이다. (그림 '남자도 화장을 지울 곳이 필요하다')

노력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대충 살자는 이야기도 아니다. 자신의 작은 성공을 '열씨미'만으로 설명하지는 말자는 거다. '열씨미의 통제 강박'에 빠지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불안하지 않아야 성공한 삶이다. 잠푹 자고, 많이 웃는 삶이 진짜 성공이다. (그림 '내 맘대로 되는 게 이상한 거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다가가려는 접근동기는 '전체지각(숲)'을 활발하게 한다. 반면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도망치려는 회피동기는 부분을 뜯어보는 '부분지각(나무)'을 더 촉진시킨다. 히긴스와 그의 동료는 불안하면 부분지각이 강해지고, 행복하면 전체지각이 강해진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림 '생각보다 너무 오래 산 고양이')

삶의 맥락이 바뀌면 아예 존재 자체가 달라진다. 그렇게 속 썩이던 아이가 군대에 가면 전혀 다른 인간이 되는 경우가 그렇다. 내 아들이 그랬다. 면회를 가거나 휴가 때 만나면 그 의젓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너무 자랑스러웠다. 말년 병장 때는 자신의 포상 휴가를, 어머니가 편찮으시다며 괴로워하는 이등병에게 양보했다. 그 기간에 내 아들 녀석은 유격 훈련을 받았다. 난 너무 감동한 나머지 잠시 아내를 의심했다. 나 같은 이기적 인간에게 어찌 저런 이타적 아들이 가능할까 해서다. 그러나 제대하니 이건 말짱 도루묵이다. 아주 게으르고 '드~럽다'. 군대 가기 전의 내 아들로 완벽하게 다시 돌아왔다. 얼굴 마주칠 때마다 아주 환장한다. 그렇다면 군대에 있던 그 의젓하고 폼 나는 아들이 진짜인가, 아니면 게으르고 드~러운 아들이 진짜인가? 둘 다 진짜다. 존재란 항상 자신이 속한 맥락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본질을 규정하는 맥락에 관한 설명은 '텍스트Text'를 '콘텍스트Context'와의 관계로 설명하려는 해석학에서 유래한다.

...

삶의 게슈탈트를 바꾸는 방법은 대충 세 가지다. 첫째, '사람'을 바꾸는 거다. 항상 같은 사람들을 만나 똑같은 이야기를 반복하지 말아야 한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경청할 수 있어야 삶의 게슈탈트가 건강해진다.
둘째, '장소'를 바꿔야 한다. 장소가 바뀌면 생각과 태도도 바뀐다. 내가 일본에서 몇 년 지내보니 진짜 그렇다. 요즘 난 내 아들보다 더 게으르고 드~럽게 산다. 제대한 그 녀석은 내 아들이 확실하다. (그림 ' 내 발자국-내 이야기')

삶도 마찬가지다. 내가 원하는 것이 구체적이지 않으면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 돈은 아주 막연한 거다. 그 돈으로 뭘하고 싶은지 분명하지 않으면 돈은 재앙이다. 사회적 지위도 마찬가지다. 그 지위를 가지고 내가 뭘 하고 싶은 것인지 분명치 않으니 다른 사람들 굴복시키는 헛된 권력만 탐하게 된다.

서은국 교수가 쓴 『행복의 기원』
서 교수의 메시지는 아주 간결하고 분명하다. 행복감이란 생존과 종족 보존을 위한 수단일 따름이며, 행복은 아주 구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한다는 주장이다. (그림 '구체적 추상-클레,실레,피카소 IV)

그러나 21세기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기계적 '외눈'의 지배를 받는다. 아침부터 밤까지 스마트폰, 컴퓨터, TV 모니터만 들여다본다. 그리고 내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보다 외눈의 카메라로 기록한 세계가 더 정확하고 진실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어디든 놀러 가면 꼭 이렇게 외친다. "와, TV에서 본 것하고 똑같네!" TV에서 봤으니까 진짜라는 이야기다. 아, 이건 순서가 완전히 뒤바뀐 거다.

인류는 수만 년의 역사를 통해 겨우 얻어낸, 본질의 통찰 능력을 스스로 포기헀다. 사물의 본질을 스스로 파악 할 수 없으니 자신의 존재가 헷갈리는 건 당연하다. 내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스스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어야 불안하지 않다. 그래야 제대로 사는 거다.

돌아다닐 수 있을 때 부지런히 보고 다녀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자신의 두 눈으로 사물의 본질을 통찰하는 것이 존재의 기반이다. (그림 '자꾸 눈을 깜박이게 하는 여인')


문제야 어느 사회든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 문제 해결 방식이 이토록 거칠고 투박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분단 때문이다. 분노와 적개심이라는 한국인의 낡은 집단심리학적 상처는 이 황당한 분단 상황 때문에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달리 설명할 방법이 없다. '우리편' 아니면 바로 '적'이라는 분단의 이분법이 한국인들의 인지적 쉐마(schema)로 굳어졌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통일이 되어야 하는 거다. 이 뿌리 깊은 집단 심리학적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통일은 꼭 되어야 한다. ('반만년 유구한 역사의 한민족'이기 대문에 통일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낡은 민족주의에 기초한 당위적 통일론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 전혀 설득력 없다.) (그림 '통일은 도둑처럼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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