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
살림과 돌봄에 관한, 이름 없는 노동의 실체를 밝히는 책이 나왔네요.
김희경 작가의 《이 일에는 이름이 없다》는 '기획 노동, 누구나 하지만 아무도 부르지 않은 일'에 관한 기록이네요.
저자는 집안일, 가사노동, 살림, 육아, 간병, 돌봄 등을 포괄하여 '돌봄'이라는 용어를 써왔고, 해외에는 '인지 노동' 또는 '정신적 부담'으로 부르지만 이 책에서는 국내 연구진이 명명한 '기획 노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 개념과 본질을 소개하고 있네요.
"집안일을 해본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조금만 꺼내도 '아, 그거!' 하고 '머릿속 살림과 돌봄'의 정체를 알아맞힌다. 아무리 쳐내도 끝나지 않는 '할 일 목록' 때문에 머릿속은 뒤죽박죽인데 마땅한 이름조차 없는 일. 뇌를 꺼둘 수도 없는데 눈에 보이지 않기에 '일을 나눠 하는데도 왜 나는 피곤할까'를 고민하게 만드는 이름 없는 노동. 이를 국내 연구진이 '기획 노동'이라 명명한 것이 2024년 무렵 매체에서 다뤄지자 맘 카페와 소셜 미디어를 중심으로 금기를 건드리는 소문처럼 '기획 노동'이라는 단어가 빠르게 번져나갔다.
(8p)
요즘은 가사 분담이 평등하게 이루어지는 것 같지만 속내를 들여다 보면 기획 노동을 떠맡는 사람과 주어진 일만 겨우 하는 사람 간에 깊은 간극이 존재하네요. 살림과 돌봄의 기획 노동은 눈에 보이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기 때문에 기획 노동을 떠맡은 사람만이 그 노동의 무게를 견디면서 점차 지쳐가고 있네요. 그래서 저자는 보이지 않는 노동, 이름 없는 일에 붙여진 '기획 노동'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리고자 맞벌이 부부, 워킹맘, 싱글맘, 전업주부, 부모 돌봄을 혼자 떠맡다시피 한 자녀들, 장애아 엄마와 장애 당사자를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전하고 있네요.
살림과 돌봄을 여성의 일로 간주하는 가부장제의 성별 역할 규범과 산업화 이후 남녀의 역할을 공적, 사적 영역으로 나눈 이데올로기 밑바닥에는 소위 모성 본능의 신화가 깔려 있는데 이는 20세기 중반 이후 다양한 연구를 통해 반박 증거들이 나오고 있네요. 미국 사회학자 앨리슨 데이밍거의 연구에 따르면 부부 간 기획 노동의 불평등은 성향이나 성격 차이가 아니라 기술을 어떻게 쓰냐의 차이라고 분석했네요. 이성 커플의 남녀는 유급 및 무급 노동에서 자신의 역량을 다르게 활용했는데, 많은 남성들이 돈을 버는 직장에서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집안일을 돌볼 만한 정신적 에너지를 남겨두지 않는 반면에 여성들은 그럴 수 없어서 소진되거나 경력을 바꿔야 하는 상황에 부닥친다는 거예요. 이는 남녀의 기질 차이가 아니라 남성들이 일터에서 발휘하는 정신적 기술을 집에 돌아오면 꺼버리는 선택적 무능 때문이라고 보고 있네요. 주 양육자로 아이를 키우는 남성 동성혼 커플의 뇌를 관찰했더니 시상하부를 포함한 감정 처리 네트워크가 활성화되었다고, 즉 포유류 어머니와 같은 생물학적 반응이 남성의 뇌에서 활성화되었다는 거예요. 따라서 기획 노동의 본질은 여성의 전유물도, 사랑의 본능도 아니며 훈련과 경험을 통해 습득되는 기술이자 역량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혼자 살아갈 수 없기에 돌봄을 수행하는 기획자이자 돌봄을 받아야 하는 당사자로 살아갈 수밖에 없네요. 기획 노동에 대해 깊이 들어갈수록 돌봄은 단순히 개인이나 성별 문제가 아니라 사회 문제로서 공동체 기반의 대안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는 계기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