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서재

임소운님의 서재
  • 호수와 암실
  • 박민정
  • 15,120원 (10%840)
  • 2025-05-02
  • : 1,675
기억이 저 멀리 축축하고 더러운 어두움까지 나를 특급 수송하려고 할 때, 재이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재이를 만나는 기쁨이 아니었다면 과연 내가 수영장에 계속 다녔을까. -25p, 재이

*

작품의 등장순서와 별개로 작년 이맘때 읽기 시작한 <바비의 분위기>로 거슬러올라간다. 그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 <백년해로외전>이 나왔고, 가을에는 소설 잇다의 <천사가 날 대신해>를 포함한 북토크(를 포함한 문학주간)에 다녀와서 한참 뒤인 연말에 책을 구입했다. 로사를 보는 순간 걷잡을 수가 없었다. 로사라는 인물은 <천사가 날 대신해>의 박민정 파트를 순삭하게 했다. 이 콜라보의 씨앗이기도 한 김명순 파트를 반 년 동안 야금야금 읽었다. 리뷰를 3월에 하려다, 4월에 하려다, 5월이 되도록 물고 있었다. 그런데 <호수와 암실>이 나왔다. 로사가 나온다. 그런데 다른 로사다.

다르지만 같은 로사다. 로사의 존재는 악역이지만 퇴치해야 할 마녀는 아니라는 데 의미가 있다. 보다 정확하게는 <호수와 암실> 기준으로 화자인 연화가 직접 고백하듯이, 바로 연화 자신이 로사와 알리고 싶지 않은 과거를 공유하는 만큼 닮아있다. (이 유사성은 이번 책과 세계관을 공유하는 <천사가 날 대신해>와는 조금 다르다.) 한편 로사 같은 인물이 분열시키는 자매애는 연꽃을 피우는 심정으로 회개하는 연화에 의해 간신히 지탱하는 중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유일한 돌파구이자 엄청난 희망인데, 그것이 재이 같은 여성의 각성 혹은 양심과 연화의 선을 넘지 않는 진심에 달려있다는 것이 쓰라리다.


*

나는 내가 철저하게 나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내게 도가 지나친 나르시시즘이 상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 같은 사람이 지독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걸 눈치챈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괴물이라도 본 듯 후다닥 도망가고 만다. 차라리 로사 같은 인간처럼 눈에 띄게 이기적이고 별스러운 미친년이라면 새삼 놀라지도 않을 텐데. 나는 재이에게도 이런 걸 숨겨왔다. -99p, 사진작가

연화는 과격해지고 때로는 저열해지며 자신이 마주 보는 심연에 맞닿아 있다. 그렇기에 연화는 암실과 같은 남성적인 세계를 자멸하도록 하는 것 이외에도 자신의 여성적 세계에 내밀하게 자리 잡은 내부의 모순, 어쩌면 자신의 호수에도 가라 앉아 있을지 모르는 이름 모를 시체의 진실과도 대결해야 한다. 경멸하는 로사의 세계를 탐색하면서도, 가까스로 자신을 바로잡으며 재이에게 다가서야 하는 이유다.
-274p, 해설_씐 것과 쓰는 것(박인성)


*

나는 못된 생각을 하며 세윤의 말을 들어줬다. 세윤을 대하는 나의 태도도 어느 정도는 거짓이었다. 세윤이 말하는 '아주 나쁜 사람들'에 내가 해당 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만 나는 마치 투항하러 온 사람들을 죽여놓고 십자훈장을 받은 미군이라도된 양 입을 굳게 다물었다. 나라는 인간은 세윤보다 로사에 더 가깝다는 사실을 때로 상기하면서.
-박민정, <천사가 날 대신해>

소설 「천사가 날 대신해」를 쓸 적에는 다분히 김명순 작가의 「의심의 소녀」를 의식하고 있었다. '불쌍한 아이'가 어여쁘기까지 해서 관심의 대상 이 되고, 그 의심의 아이'의 정체가 '불쌍한 아이' 로 귀결되기까지에 이르는 이야기. 내가 여태껏 쓴 단편과 장편 들에 등장하는 아이 역시 바로 의 심의 소녀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박민정, ‘때가 이르면 굳은 바위도 가슴을 열어’, 소설 잇다 <천사가 날 대신해>


*

<호수와 암실>을 읽고 와서 <천사가 날 대신해>의 박민정 파트를 다시 읽었다. 그런 후에야 마침내 김명순 파트를 다 읽었다. (김명순 콜렉션은 다음편에 계속)

반복해서 내 심장을 파고드는 키워드는 ‘내부의 적’이었는데, 이 또한 시기별로 점점 ‘조직 내부’에서 ‘나의 내부’로 이동해 온 역사가 있다. 적이 이동했다기 보단 적이 원래 있던 곳을 추적해서 거슬러올라온 것이다. 내 안의 여성혐오자.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용서할 수 없는 여성만의 행위를 혐오 없이 해석할 수 없는 나 자신의 기만에 대해 오래 생각해왔다. 그런 마음에 위로를 주는 책이다.

로사라는 이름(의 유래)에서 예상했지만.


  • 댓글쓰기
  • 좋아요
  • 공유하기
  • 찜하기
로그인 l PC버전 l 전체 메뉴 l 나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