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강에게 반할지도 몰라
임소운 2025/04/13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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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강밭
- 박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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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 2025-03-28
: 370
고구마를 심고 고구마가 자라고 고구마가 열린다. 그것이 어떤 모양새든 얼마만큼의 양이든 그 사실은 변함이 없다. 난 이러한 과정이 마음에 들었다. 심으면 자란다. 이 당연한 일이 기적처럼 느껴진 것은 내 나이가 적지 않은 탓일 수도 있다. 세상엔 노력해도, 아무리 심어도 열매를 맺지 않는 것들이 있다. 심은 것들이 자라는 동안 내내 폭풍우가 치고 두더지가 돌아다니며 파먹고, 이상 기후가 계속되는 일들이 태반이다. 노력은 언제나 결과를 담보로 하지 않는다. 그런 와중에 들깨를 심으면 들깨가 나고, 고구마를 심으면 고구마가 나고, 고추를 심으면 고추가 자라는 밭의 세상은 기이할 정도로 정직했고, 그 정직함은 아름다웠다. -17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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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도 생강도 즐겨먹지 않는다. 보다 정확하게는 파, 양파, 부추 등 매운 채소나 향신료 등을 날것으로 먹지 못한다. 지난 삼월의 주식이었던 삼겹살을 먹기 위해 마늘장아찌를 상주시켰다. 생강차를 가끔 마시기도 하지만 일단 구하기가 너무 어렵고, 그렇게까지 생강의 효능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런데 생강밭이라니.
부제인 농사무지랭이의 록키호러밭일쇼를 보니, 생강밭에서 생강을 키우는 이야기인 것 같다. 생강보다 농사가 주제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물론 전공이 농사에 실제로 도움이 되진 않는다. 내 시골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 아직도 잘 모른다. 다만 이 시골이 그 시골과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은 알게 됐다. 왜, <타짜>가 인생영화인데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지 않나. 극중 타짜님의 시골도 그 시골과 그리 멀지 않다. 궁금하면 <생강밭>을 읽어보자.
한달살기가 1년이 되고 4년이 되어버린 귀농. 자식농사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국인에게 농업은 곧 세상의 법칙과 같다. 우리는 멘델이 콩을 심기 전부터 콩 심은 데 콩 나는 걸 알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인 저자는 자연의 법칙에 위로를 얻으면서도 끝없는 풀뽑기에 지쳐가다 마침내 수확의 기쁨에 도달한다. 농사와 뗄수없는 계절요리가 각 챕터의 부록으로 나오길래 이거 혹시 일본 힐링에세이 같은 건가? 하고 흠칫했는데 읽다보니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서 흡족했다. 재작년 가을 시골에서 밤을 주워오면서 밤조림 이야기를 했던 기억도 소환했다. (근데 그 밤은 어디에 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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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걸 혼자 다 하세요? 저는 이것만으로도 벅찬데요.”
"아이고 나 따라 올 생각 말어. 난 30년을 농사를 지었어. 밭을 몇천 평씩 했어. 지금이야 밭이랑 논이랑 다 넘겼지만 내가 농사로 6남매를 키운 사람이여.“
"세상에 그걸 어떻게 하셨어요? 농사를 짓고 싶은 데 전 엄두가 안 나요.”
"풀베기 힘들지?"
"네.”
"천천히 혀. 조금씩 하다 보면 점점 일꾼이 돼.”
"그럴 수 있을까요?"
"그럼. 지치지 않게 천천히 혀." -83p
나도 내 생강이들을 들고 그런 박람회에 참가하러 가고 싶다. 다른 생강은 어떻게 컸나 궁금하기도 하고 어떻게 키웠나 물어도 보고 싶고, 풀은 어떤 풀이 났었는지, 파밤나방과 조명나방은 어떻게 잡았는지 같이 이야기하며 맞장구치고 웃고 그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강을 캐고 팔면서 비록 주인공도 아니고 조연이라고 볼 수 없을 만큼 등장하는 장면도 거의 없지만 메릴 스트립의 '남편'을 떠올렸다. 그는 그 박람회에서 걱정 없이 즐거웠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런 사람인 것이다. 물론 '내'가 그런 사람이라 는 주장은 아니다. 결코. 물론 '내'가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는 주장도 아니다. 아, 꼭 '나'를 정의하려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으로 마무리해야겠다. -12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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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급자족을 해서 지구를 덜 아프게 하려면 뼈빠지게 풀을 뽑아야 한다. 작물을 키우는 건 뿌듯하지만 그 뿌듯함에 이르기 위한 과정을 알기에 육아와 마찬가지로 게임 속에서 대리체험을 하고 만다. 농사를 지어서 자식을 키우고 다른 사람들까지 말그대로 먹여살리는 그 피땀을 체감한다는 건 생각보다 험난한 과정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생강밭>이 있다. 여행과 글쓰기로 단련된 저자의 관찰력을 통해 좀더 생생한 간접경험이 가능하다. 인생 비유는 덤. 뭉클하지만 담백하다. 왜 이 책이 재채기가 되어 나왔는지 알 것 같다.
(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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