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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님의 서재
  • 성에
  • 김형경
  • 10,800원 (10%↓600)
  • 2004-03-29
  • : 1,345

그랬다. 내가 이제까기 찾고 기다리고 헤매 왔던 것이 바로 이 작가가 말하는 환상이었다. 나는 그게 현실이 되어 줄 것을 기대하고 살아왔는데 현실이 되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내 마음이 어찌 이토록 편안해지는 것인지.

책을 읽는 내내 이런 일이 있을까 싶기는 했다. 시간이 흘러 다시 만나는 옛사랑도 그러려니와 그 사랑에서 지난날의 감정을 읽을 수 있다는 것도 부질없어 보이기는 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살아있는 이유가 바로 그러한 환상의 힘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는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참나무, 박새, 청솔모, 바람이 들려주는 이야기도 색다르다. 우리가 그들을 자연의 일부로 보고 사는 것처럼 그들도 우리를 자연의 일부로 보고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환상이 어쩌면 그들의 환상과도 맞닿아 있는 것이리라.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힘의 근원에 그 환상이 있는 것이라고, 언뜻 생각하면 환상이라는 것이 삶을 맥빠지게 만드는 것으로 보일 테지만 사실은 환상이 있어서 우리가 남은 날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라고 책을 읽는 동안 그런 생각을 했다.

무엇보다 내 환상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 주었던 것이, 그 환상이 비교적 건강한 것이라는 확신이 나를 안도하도록 해 주었다.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 (y에서 옮김20040806)


[인상깊은구절]

..환상을 대할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그것에 끌려가거나 일방적으로 그것을 쫓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자신의 내면에 어리석은 환상 따위는 키우지 않는다고 큰소리쳐서도 안 되며, 재수 없는 환상이라는 놈을 기어이 때려잡아 박멸하고야 말겠다고 기염을 토해서도 안 될 것이다. 그중에서 가장 조심할 일은 환상을 현실 속에서 성취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환상은 손에 넣는 순간 즉시, 필히 환멸로 바뀌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달콤한 행복을 기대했던 결혼 생활이 피 터지는 갈등으로 변하고, 일상을 털어내듯 출발한 여행에서 더 곤고한 일상을 맞닥뜨린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만약 불행하게도 환상이 현실이 되어 환멸이 찾아온다면 그 환멸을 또 하나의 현실로 인정한 다음 결코 실현될 수 없는 멀고 먼 환상을 새롭게 영접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음껏 빛나고 아름다운 것, 현실과 무관하며 허황된 것, 가장 충만해서 서러운 것으로 다시 환상을 골라 잡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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