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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님의 서재
  • 밤은 부드러워, 마셔
  • 한은형
  • 15,300원 (10%↓850)
  • 2023-11-20
  • : 691

이 현상을 뭐라고 해야 할지, 읽고만 있는데도 취하고 취하는데도 정신은 더 말짱해지고 더 읽고 싶어지고 더 상상하고 싶어지고. 내게 부드러운 것은 밤도 술도 아니고 글인 것만 같으니.  


소설가의 글인데 소설보다 산문에 먼저 반한다. 종종 있는 일이다. 산문의 소재이자 주제가 술이라서 더 끌렸다. 나는 술을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닌 것 같고, 잘 마신다고도 할 수 없고, 술에 대해 아는 바도 영 없고, 술에 취하는 분위기는 아주 싫어하고, 술친구도 없고, 자주 가는 술집은 커녕 좋아하는 술안주도 하나 없는데, 왜 나는 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특히 술에 대해 아주 맛있게 써 놓은 글을 만나면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아니, 빠져나오고 싶지 않다. 이 책의 후속편도 나와 있다는 것을 좀 전에 알았다. 방금 구해 놓았다. 


책은 봄-여름-가을-겨울로 나누어져 있다. 이런 편집의 경우 내가 처한 시기에 맞춰 읽는다. 가을부터, 가을이 오고 있으니까. 글의 시작부터 내 의식을 붙잡는다. 이 흐름은 뭐지? 카프리에서 멈춘다. 나는 카프리를 마시고 싶어진다. 무슨 맛이지? 나는 술맛도 맥주맛도 모르면서 작가가 풀어놓은 서술에 빠져든다. 안 마시면 사는 데에 엄청난 손해를 입을 것만 같다. 다음, 연엽주가 나온다. 구입할 수 없는 술이라는데 인터넷 쇼핑몰에서 찾아본다. 팔고 있다. 한 병에 70000원이다. 흠, 못 사 먹겠군. 간단하게 포기한다. 다음, 아와모리 야구단 일화가 나온다. LG 구단 이야기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아니므로 넘긴다. 그리고 커피 맥주. 커피 따로 맥주 따로 마시기만 했는데 섞어서 마실 수 있다니. 올 가을이 끝나기 전에 꼭 만들어 마실 테다.


여름으로 되돌아왔다. 작가는 술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나는 읽고 싶은 책 둘을 얻는다. 약주를 알려주는 토마스 만의 <마의 산>과 6월 16일에 기네스를 마시게 하는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 내년 여름이 오기 전까지 아니 여름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이 둘을 읽을 수 있기를. 둘 다 분량이 많아서 부담도 되고 기대도 되고. 취하지 않았음에도 취한 기분으로 설렌다.


겨울로 건넜다. 하나 건진다. 무알콜맥주. 나는 무알콜맥주를 무시했는데, 마셔 볼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는데, 작가의 글로 마셔 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름 성공이다. 내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는 독서가 된 것이니. 


봄은, 봄의 글은, 봄의 술 이야기는 싱거웠다. 제일 뒤에 읽어서 다행이다. 먼저 읽고 실망부터 했다면 가을과 여름과 겨울의 이 기막힌 술맛을 눈으로 맛볼 수 없었을 테니. 


당분간 이 작가의 글과 함께 할 예정이다. 




각자의 필드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각자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과 함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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