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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개비님의 서재
  • 언어의 무게
  • 파스칼 메르시어
  • 19,800원 (10%1,100)
  • 2023-04-03
  • : 4,540

먼저 책의 외형, 아주 내 취향이다. 무엇보다 두껍고 단단하고 표지의 그림은 선명하면서 아득하고. 바닷물 사이로 키가 큰 가로등 사이로 걸어가는 이의 뒷모습을 따라 나도 간다. 무서운 듯 싶어도 유혹적이다. 내가 이렇게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사람이었던가.


주인공은 아팠다. 아파서 병원에 갔는데 의사로부터 죽음의 선고를 받는다. 자신의 남은 날들 앞에 다가오고 있을 죽음을 기다리는 마음은 어떠할까? 절망하고 절망하고 또 절망하게 될까. 매일 아침 눈을 뜨면서 오늘은 살았구나, 내일에도 살아날까? 밤에 잠드는 일은 또 어떨까? 잠이 오기는 할까? 안 자고 못 자다가 어느 순간 지쳐 쓰러지게 되는 것일까? 그리고 또 놀랍게도 깨어나고? 글을 읽어 나가는 동안 작가의 처지에 나의 상상력을 갖다대면서 나는 멋진 혼란을 겪었다. 이 소설은 소설만이 아니었다. 온전한 삶의 온전한 형상 하나였다.  


곧 죽을 줄 알았기에, 자신이 살아 있었던 흔적을 모조리 정리까지 하고(운영하던 출판사도 팔았는데), 죽음에 기꺼이 굴복하려는 즈음 자신의 뇌사진이 다른 사람의 뇌사진과 바뀌었다는 것을 주인공이 알게 된다. 의사가 사진 아래의 환자 이름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던 것. 안 죽을 사람을 죽을 것이라고 하고 곧 죽게 될 사람에게 안 죽을 것이라고 진단하는 의사라니. 이렇게 하여 누군가의 실수로 잃어버릴 뻔했던 내 목숨을 되찾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심정은 어떠할까? 새롭게 다가오는 남은 날들이 이제는 어떻게 보일까? 소설은 참으로 끈질기고도 웅장하게 나아간다. 하루하루 만나고 헤어지고 추억하고 몰두하는 일을 되풀이하면서. 나는 이 책만큼은 다른 책과 같이 읽을 수가 없었다. 온전히 이 책에만 매달렸다. 


읽는 동안 내가 나에게 할 말이 너무 많아서, 하고 싶은 말도 너무 많아서 책을 수월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과제처럼 의무처럼 책 속 사항들을 정리해야 하는 처지가 아닌 것이 얼마나 다행스럽던지. 읽고 묻고 답을 고르고 잊어버리고 다시 읽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내가 언어를 이만큼 좋아하는 수준이라는 것에 또다시 만족하고 고마워하고. 책은 나를 괜찮은 독자로 자꾸 확인시켜 주는 듯하였다. 


좋은 사람 옆에는 좋은 사람이 있다고 했던가. 옆에 있는 사람을 보면 당사자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도 했던가. 주인공 레이랜드와 이어진 사람 중 형편 없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심지어 오진한 의사조차 악의나 무지로 그런 실수를 저질렀던 게 아니라고 믿어졌으므로), 나는 이게 가장 문학적이라고 여겼다. 문학이 아니고서는 이런 세상을 창조할 수가 없다. 현실이 지루하고 지긋지긋하고 끔찍하고 인간이라는 존재가 더없이 초라하고 하찮고 짜증스럽게 여겨질 때마다 꿈꾸게 되는 문학, 문학 속 인물, 문학 속 세상. 레이랜드를 통해 촘촘하게 펼쳐 보이는 세상. 


번역이 이렇게 달콤한 작업이었나, 번역가가 이렇게 숭고한 직업이었나, 소설가가 이렇게 복잡한 예술이었나. 어느 것 하나도 가볍게 놓아 보내지를 못하겠다. 내가 앞으로 읽을 글들은 얼마나 무거운 무게로, 얼마나 무거운 감동으로, 얼마나 무거운 사명감으로 나를 사로잡게 될 것인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언어와 모르는 언어들에게 어떤 경의를 품게 될 것인지. 알 것도 같고 모르는 것도 같다. 혼란스러워도 전혀 답답하지 않다. 오히려 흥미로워진다. 주인공이 낯선 언어를 모두 배우려고 했던 마음처럼 나도 모든 글 앞에서 설레게 될 것이다.


가까운 이의 죽음을 맞이하고 보내는 순간은? 우리 모두는 죽을 것인데, 내가 먼저 죽을지 네가 먼저 죽을지 모르면서 우리 스스로는 자신을 죽음의 길에서 빼놓는다. 오래 생각하고 있다. 나도 모를 나의 죽음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어가게 될 것인지를. 내 곁에 있는 사랑하고 아끼는 이들의 죽음을 먼저 맞게 된다면 내가 또 어떤 사람으로 바뀌게 될 것인지를.


책에 담긴 언어의 무게가 그윽해서 참으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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