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오래 전에 이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옛적의 책을 이사하면서 처분한 줄 알고, 한번 더 찾아보지도 않고 새로 구입했다. 무엇보다 표지의 색이 마음에 들었다.
오래 전, 대학생이었을 때 읽었다고 생각하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이번에 읽으면서도 같은 마음이었다. 떠오르는 건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리고는 마음을 붙잡는 구절들을 타이핑했다. 실려 있는 글들 전부가, 문장 전부가 다 내 마음을 건드리는 건 아니었으나, 어떤 대목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걸 싶었으나, 내가 알아차리는 문장들에서만큼은 반짝거렸다. 글도 내 눈도 내 심장까지도.
산문은 소설과 달라서 작가를 온전히 내보이는 글이라는 걸 확실하게 알고 있어서 더 빠르게 와 닿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어떤 산문은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내내 곁에 머물 수도 있다는 걸 또 확인했다. 저마다 이런 책을 많이 갖고 있다면 가진 만큼 남은 생이 더욱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이런 생각도 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거슬린 글이 있다. '고양이 물루' 편. 이렇게 끝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내가 다 용서를 빌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책을 처음 읽을 그때는 몰랐을 감정이 이제는 생긴 셈이다.
리뷰를 쓰기 전, 책을 책꽂이에 정리하려다가 옛 책을 발견했다. 이럴 수가, 나는 이 책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새삼스러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겨 보았다. 누렇게 바랜 종이, 꽤 작은 인쇄체 글씨, 그리고 그 시절에 그어 둔 곳곳의 밑줄들. 이번에 그은 밑줄과 상당히 겹친다. 그런가, 나는, 내 생각은, 내 이상은, 내 열망은 그동안의 세월에도 바뀌지 않았던 것인가. 바뀔 이유도 명목도 없었던 것인가. 나는 어쩌면 여전히 그때 그대로의 나인가.
삼십 년쯤 지나서, 그때도 내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다시 이 책의 개정판이 나와서, 처음인 듯 읽어 볼 수 있다면 그때 긋는 나의 밑줄은 또 어떠할까. 이 책의 남은 시리즈들도 야금야금 구해 보아야겠다. 내게는 '어느 개의 죽음에 관하여'도 있단 말이지. (y에서 옮김20210211)


얼마나 엄청난 공허인가! 바위들, 개펄, 물…… 날마다 모든 것이 전부 다시 따져 보아야 할 문제로 변하는 곳이니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 P25
상표가 서로 다른 두 자루의 펜을 놓고 선택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실로 참혹하다. 가장 좋은 것이 반드시 가장 비싼 것은 아닐 터이니 말이다.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 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목숨이 붙어 있는데 왜 안 살아? 왜 제일 좋은 걸 안 골라? 하고 귀에다 속살거리는 그 악마 말이다. 이렇게 되면 곧 뜀박질을 하고 여행을 떠나고…… 그러나 ‘이제 막’ 욕망이 만족되려고 하는 순간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순간인가. - P28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 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 우리는 추론을 통해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 P87
가장 달콤한 쾌락과 가장 생생한 기쁨을 맛보았던 시기라고 해서 가장 추억에 남거나 가장 감동적인 것은 아니다. 그 짧은 황홀과 정열의 순간들은 그것이 아무리 강렬한 것이라 할지라도 - 아니 바로 그 강렬함 때문에 - 인생 행로의 여기저기에 드문드문 찍힌 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순간들은 너무나 드물고 너무나 빨리 지나가는 것이어서 어떤 상태를 이루지 못한다.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며 항구적인 어떤 상태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루소의 묘사) - P97
바다 위에 떠가는 꽃들아, 가장 예기치 않은 순간에 보이는 꽃들아, 해초들아, 시체들아, 잠든 갈매기들아, 배의 이물에 갈라지는 그대들아, 아, 내 행운의 섬들아! 아침의 예기치 않은 놀라움들아, 저녁의 희망들아 - 나는 또 그대들을 이따금씩 다시 보게 되려는가? 오직 그대들만이 나를 나 자신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그대들 속에서만 나는 나 자신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티 없는 거울아, 빛 없는 하늘아, 대상 없는 사랑아……- P103
무케르지는 말한다. "우리 예술은 본질적으로 상징적이다. 이것은 예술을 추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한 고의적인 노력을 드러내 보인다. 그래서 인도의 어디를 가건 상징에 의하여 모양이 일그러진 아름다움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아름다움으로 무엇이나 다 되는 것은 아니니까. 아름다움이란 너무나도 빈약한 음식이어서 그것만 먹고 살 수는 없다. 우리는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어디서나 성스러움의 벌겋게 달군 부젓가락으로 낙인을 찍어 그것을 파괴한다….. 예술의 절정은 예술을 무로 환원시키는 일이다."- P133
전혀 존중받지 못하는 인간.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인간의 가장 훌륭한 몫은 바로 인간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그것이니까…… 폭력에 의하여, 힘에 의하여, 계책에 의하여 터무니없는 제도에 의하여, 견딜 수 없는 속박에 의하여 인간으로부터 그의 신성이 분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 P152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인심 좋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쪼잔한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변질시키지 않는 일이다. - P162
여행을 해서 무엇 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테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아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 말했듯이 이 짧은 공간 속에 긴 희망을 가두어 두자. 마조레 호반의 자갈밭과 난간을 따라가며 사는 것은 불가능하니 그저 그것의 영광스러운 대용품들이나 찾을밖에!- P169